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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정영진 2010. 10. 6. 15:02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 70호, (1926년 6월)

 

*깝치다-재촉하거나 서두르다의 경상도 사투리

*들매꽃-봄에 피는 들꽃의 경상도 사투리

*지심매던-김매는 행위의 방언

 

 

상화(尙火, 想華), 무뉘, 무성(無星), 백아(白啞)
1901년 대구 출생
1915년 경성 중앙 학교(京城中央學校) 입학
1919년 3·1 운동 때 대구에서 거사하려다 실패
1922년 문학 동인지 {백조} 동인
1925년 KAPF에 참여
1927년 의열단 이종암(李鍾岩) 사건으로 구금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감
1936년 귀국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1943년 사망
시집:  늪의 우화(1969), 나의 침실로}(1977, 석인상(石人像)(1984),

이상화 시집(198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86) 외


출처 : 詩香의 숲 綵雲齋[4대강 패륜 STOP]
글쓴이 : 無影/박희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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