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유모차 한 대를 힘없는 노인이 의지하며 끌고 간다.
지팡이를 타고 다니는 마녀처럼
저 노인에게는 저 유모차가 지팡이인
셈이다.
더 이상 굴러가지 않았던 시간 동안
뼈마디는 더 여리고 약해졌다.
그 여린 관절들이 삐걱거리며 걸어간다.
마치
수동 타자기로 글자를 찍듯 한 발 한 발 꼭꼭 찍으며 언덕을 올라간다.
걸음마를 새로 배우려는지
등뒤에서 차가 경적을 울려도
뒤돌아보지 못한다.
가만히 보니 유모차 한 대가 굴러가고 있다.
내장이 모두 사라진 빈 유모차다.
몸을 감싸던 폭신한 내용물들이 모두 썩어
없어진
속이 텅 비워져버린 빈 유모차 한 대가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다 썩어 냄새나는 옹알이 몇 마디만 고여있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오전의 시간이
저 노인에게는 한 생애의 반나절이다 어쩌면
저 언덕을 다 오르는 것으로 남은 반나절을
채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길을 금세 잊어버리는 바퀴와
이 골목 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과
그 골목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녹이 슬어 가는 저 유모차.
그곳의 길에 알맞은 걸음을 배우고 있는
저 老人.
현대시학 (2002년 6월호)
출처 : 詩香의 숲 綵雲齋[4대강 패륜 STOP]
글쓴이 : 無影/박희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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