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윤제림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 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윤제림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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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참 건강한 시를 읽습니다
따스한 눈길을 읽습니다
이래서 살만한 세상이고, 살만한 이유를 찾으면 행복합니다
다른 시 몇 개를 소개합니다.
버드나무 아래 -윤제림
대형트럭 하나가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서 있다. 고단한 모양이다. 그 옆에 늙은 버드나무도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 는다. 그늘 아래 웃통을 벗고 사내가 네 활개를 벗고 잠들어 있다. 아니, 늘어져 있다. 언뜻 보면 죽은 것 같다. 우리 할머 니가 보셨으면 가서 흔들어 보라고 하셨을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그늘뿐이다.
가정식 백반 -윤제림
아침 됩니다 한밭 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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