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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정록 시 모음

정영진 2016. 8. 7. 16:29

 

병따개는 입심이 좋다/이정록  

 

동시 한 편 써서

냉장고에 붙여놓는다 
자꾸만 바닥에 떨어진다고  
식구가 자석 병따개로 눌러놓는다 
병따개 뒤로 첫 글자만 숨는다 

금강산도 식후경,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냉장고가 쉴 새 없이 심호흡 한다 
가만 보니 병따개는 무쇠이빨을 갖고 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헛말이다 
병따개는 통니 하나가 생명이다  
이 빠지면 죽는다 

 

세수

 
빨랫줄처럼 안마당을 가로질러   
꽃밭 옆에서 세수를 합니다. 할머니는   
먼저 마른 개밥 그릇에   
물 한 모금 덜어주고   
골진 얼굴 뽀득뽀득 닦습니다   
수건 대신 치마 걷어올려   
마지막으로 눈물 찍어냅니다   
이름도 뻔한 꽃들   
그 세숫물 먹고 이름을 색칠하고   
자두나무는 떫은 맛을 채워갑니다   
얼마큼 맑게 살아야   
내 땟국물로   
하늘 가까이 푸른 열매를 매달고   
땅위, 꽃그늘을 적실 수 있을까요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얼음 도마

 
겨울이 되면, 어른들은  
얼어버린 냇물 위에서 돼지를 잡았다. 
우리 동네에는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얼음 도마는 피를 마시지 않았다.  
얼어붙은 피 거품이 썰매에 으깨어졌다. 
버들강아지는 자꾸 뭐라고 쓰고 싶어서 
흔들흔들 핏물을 찍어 올렸다. 
얼음 도마 밑에는 물고기들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노을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핏물은 녹아 내려 서녘 하늘이 되었는데  
비명은 다들 어디로 갔나?) 
얼음 도마 위에 누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돼지가 있었다. 
일생 비명만을 단련시켜온 목숨이 있었다. 
세상에,  
산꼭대기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아름다운 녹

 
고목이 쓰러진 뒤에  
보았다, 까치집 속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그 어떤 옷걸이가 새와 함께  
하늘을 날아봤겠는가, 어미새 저도 
새끼들의 외투나 털목도리를 걸어놓고 싶었을까 
까치 알의 두근거림과 새끼 까치들의  
배고픔을 받들어 모셨을 옷걸이, 
까치 똥을 그을음처럼 여미며  
구들장으로 살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둥우리 속 마른 나뭇가지를  
닮아보고 싶었을까 
한창 녹이 슬고 있었다 
혹시, 철사 옷걸이는 
털실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더딘 사랑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흰 별

 
 
볍씨 한 톨 매만지다가  
앞니 내밀어 껍질을 벗긴다 
쌀 한 톨에도, 오돌토돌 
솟구쳐 오른 산줄기가 있고 
까끄라기 쪽으로 흘러간 강물이 있다 
쌀이라는 흰 별이  
산맥과 계곡을 갖기 전  
뜨물, 그 혼돈의 나날  
무성했던 천둥번개며 개구리소리들  
문득 내 머리 속에  
논배미라는 은하수와  
이삭별자리가 출렁인다 
알 톡 찬 볍씨 하나가  
밥이 되어 숟가락에 담길 때 
별을 삼키는 것이다 
밤하늘 별자리를  
통째로 품는 것이다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 (우화시)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다니던 옛날, 
자기가 꿰매는 신발에  
수많은 곤충들이 밟혀죽는 게 걱정이 되어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일 기도를 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생명을 잃는 안쓰러운 곤충의 영혼과 
무심코 여린 생명을 짓밟는 눈 못 뜬 발바닥을 용서해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발바닥 한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무릎을 탁 친 그는  
그날부터 낮고 조그마한 뒤축을 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예쁘고  
편안한 신을 신게 되었다. 
그의 예지는 신(神)의 뜻이었기에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졌다. 
신발에 깔려죽는 어린 생명들이 
삼분의 일쯤 줄어들었으며 
그로 인해 늘어난 곤충이며 새싹은 
결국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되돌려 주었다. 

 

출처 : 시인의 형님
글쓴이 : 형광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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