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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정희

정영진 2010. 10. 13. 15:54
 
 
날개
상한 영혼을 위하여
그대 생각
시 인
하늘에 쓰네
편지
고백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지울 수 없는 얼굴
꿈꾸는 가을 노래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디아스포라 -슬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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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 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 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성신 술잔 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 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 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 보고
덜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인두 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 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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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아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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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생각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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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



그대 눈썹 밑에 흐르는

미시시피 물안개에 사흘을 넋잃다

그것을 가지면 밥이 되고

갖지 않으면 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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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쓰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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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 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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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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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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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따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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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가을 노래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시집<아름다운 사람 하나>.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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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디아스포라-환상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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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환상가에게



황제의 굳건한 안정을 믿으며
죽음의 집으로 돌아와
사방 넉 자짜리 자유의 벽지로
아방궁 같은 무덤을 도배했어
무덤은 언제나 밝고 아늑하네
황제가 내려 주신 모닥불에 둘러앉아
야구 경기와 권투 시합을 보며
입이 아프도록 승리를 신봉하고
머리맡에 예비된 숙면의 술잔으로
보다 깊이 잠드는 최면을 거네
황제는 꿈 속에서 빙그레 웃으시니
우리의 충정은 가이 눈물겹게
5호 활자 속에서 <예언>도 잠드시니
그제는 고향을 팔아 버렸고
어제는 의령을 잊어버렸고
오늘은 공약을 삼켜 버려야 하네
새 법이 오리라 믿어야 하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또 하나의
튼튼하고 아름다운 무덤을 건축하며
밤을 낮이라 어둠을 빛이라 이름함으로써
<새 시대는 열렸다> 믿게 되었네


오 우리들의 두 귀는 운다네
암호로 떠도는 이 시대의 언어를
망각으로 망각으로 망각으로 흘려 보내고
이 땅의 젊은은 잠시 전율하지만
그것을 잊는 데는 두 주일이 안 걸린다네
애오라지 밝고 아늑한 무덤의 평화
사방 넉 자짜리 미래를 의지하여
탐스런 꽃봉이들 영그는 중이니
황제는 꿈속에서 빙그레 웃으시고
우리들의 나날은 가이 고요하네


*高靜熙 詩集 <<이 時代의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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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
슬픔에게



흐리고 어두운 날
남산에 우뚝 선 해방촌 교회당은
날벼락을 맞아 검게 울고
무더위로 가라앉은 내 몸 속에서는
그리운 신호처럼 전신주가 운다
끝간데 없는 곳으로부터
예감처럼 달려오는 그 소리는
한순간 고요히 물로 풀어지다가
불로 일어서다가
분노가 되다가
이내 다시
내 고향 해남의 상여 소리가 되어
저승으로 뻗은 전신주를 따라 나간다
우리의 침묵 깊은 곳에서
민들레 한 송이
서늘하게 흔들리는 오후,
민들레로 떠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디어
칼 쓴 예수가 갈짓자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高靜熙 詩集 <<이 時代의 아벨>>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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