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김충규
나무가 잎사귀를 일제히 틔우고 있다
감겨 있던 무수한 눈들이 눈을 뜨는 순간이다
나무 아래서 나는 나무를 읽는다
이
세상의 무수한 경전 중에서
잎사귀를 틔우는 순간의 나무는 가장 장엄하다
이 장엄한 경전을 다 읽어보는 것이 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이 경전을 읽으려면
마음거울에 먼지 한 점 앉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마음거울은 너무 얼룩이 져
있다는 것을
닦아내어도 자꾸 더럽혀진다는 것을
새들도 이 경전을 읽으려고
나무의 기슭을 찾는 것이다
새들을
끌어당기는 나무의 힘!
나는 그 힘을 동경한다
나무로 집을 짓고
나무로 화살과 창을 만들어 썼던 시대,
그
시대까지가 평화의 시대였다
나무 화살과 창에 맞은 짐승들은
죽는 순간의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금속 화살과 창이
나오고부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무가 경전인 줄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나무는 자신을 희생하여 온갖 경전을 기록해 주기도
하지만
나무라는 이름만으로도 장엄한 경전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계를 다 망치고 있는 것이다

김충규
시인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문예공모 시 당선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현재 문학의전당 대표
출처 : 詩香의 숲 綵雲齋[4대강 패륜 STOP]
글쓴이 : 無影박희호 원글보기
메모 :
'초대 > ▒ 초대시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시간의 길손-2/김경민 (0) | 2010.10.06 |
---|---|
[스크랩] 혀 짧은 그리움. 아니, 그, 디, 움/유용선 (0) | 2010.10.06 |
[스크랩] 죽음에 관하여/오탁번 (0) | 2010.10.06 |
[스크랩] 어머니 1/이성복 (0) | 2010.10.06 |
[스크랩]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박성우 (0) | 2010.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