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Ⅲ. 왜 쓰는가/정영자
문학과 삶
Ⅲ. 왜 쓰는가
시를 읽고 시를 사는 삶의 방식은 아름답다. 한 편의 시를 노래하고 착한 사람들과 멋진 자연환경과 이웃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의 환희이다.
삶은 우리들의 중심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 중심적 핵이 흔들리고, 방황하며 절망하는 고뇌속에 시간은 흘러왔고, 소중하게 그리고 의미롭게 자신의 삶을 창조적인 것으로 닦고 키워가는 지헤와 여유를 깨달아 가게 된다.
생명의 환희나 지혜와 여유, 그리고 처절한 절망과 갈 데 없는 고독을 우리는 표현하고자 한다. 표현욕구의 강렬성 때문에 예술은 창조되고, 예술가는 그 표현을 통하여 자신을 가다듬고 극복한다. 때문에 무엇이든지 표현하고자 하는 심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는 평범한 갈망이기도 하다. 사람은 현실의 수준에서 당면하는 욕구 불만과 갈등, 부적응과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며, 현실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감으로써 개성이 결정되고 발전된다. 그러나 사람이 당면하는 장애는 항상 합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타당한 방향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비합리적, 비현실적 적응을 꾀하여 욕구의 간접적 만족을 얻어 자아의 보호를 꾀하려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을 적응기제, 또는 방어기제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복잡 다양한 방어기제는 공격적 행동, 절충적 행동, 도피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심리적 방어기제에 의하여 예술은 위기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행복한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일련의 표현의욕으로서도 출발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실한 예술은 반드시 어떤 위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숨은 힘이다.
적응장애, 소외감, 열등감, 욕구불만, 갈등, 이런 것이 서로 모여 위기를 형성한다. 위기에서 인간은 불안과 절망과 초조를 느낄 것이다. 위기란 적응장애로 긴장된 심적상태이다. 위기에 처한 인간은 평상시와는 다른 갖가지 이상한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주어진 환경에 새롭게 균형을 유지하려고 욕망을 억압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맹종하거나 공격 한다.
예술은 위기를 당해 제일차 적응이 깨진 곳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작가는 심리적인 위기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변질시킨다. 이것이 예술적 승화이며, 작가는 이와 같은 창조적 행위를 위하여 글을 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자아를 타인의 마음 속베 새기겠다는 충동이 예술가의 예술창조행위를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칭찬을 추구하며 집요할 정도로 자아를 타인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글쓰기는 존재한다. 처절하다. 루소는 인간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자기만의 닫혀진 세계에서 고독한 몽상에 젖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반사회적 자세가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사회를 낳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형제도 이웃도 친구조차 없다. 자기밖엔 사귈 사람이 없다"고 집안에 숨었던 룻소는 습관이나 의무, 혹은 허위의식에서 해방되고자 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었다. 프로이드는 자아충동 속에 자기파괴와 자기보존의 힘이서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을 말하고 있다.
주위에 대해서 자기를 살리려면 그 어떤 점에서 자기를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이는 일이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를 살리는 길로 통하게 된다. 자아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려는 충동은 결국 자기의 생명을 확충하려는 충동의 나타남이다.
주위의 반항이 지나치게 강할 때는 자아는 희망이 없는 자기해체, 즉 자살이라는 방향을 생각하게 된다. 현대는 인간성장의 발달로 이와 같은 강렬한 저항을 받는 경우도 많아지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형이상학적 자아를 해체하고 인간성을 다양 ·복잡 ·혼돈 중에 부단히 유동하는 의식으로 파악하였다. 즉 비인간화의 경향으로 변질된 자아를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비인간화의 경향은 현대회화에서도 나타난다. 세잔느의 입체파에서는 선이나 면에서 인간적 생명감은 없어지고 추상적, 기하학적 성질로 단순화 되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음악은 어떤 것이며 그림은 어떤 것인가. 한편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처연한 서정을 가슴 가득 출렁이게 하는 그 낭만적인 여유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적 생명, 내적인 자기활동의 객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립스가 말한 바 미적 대상 안에 자기 자신이 자기의 생명을 이입하는 감정이입설은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예술의 맥이었다.
우리는 사회현실과는 유리된 공상의 세계와 개인사적인 문제의 안전지대에서 자기 삶의 탐구만으로 도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도망자로서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으며 문제제기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사회현실에 정면으로 맞설 때도 있는 것이다.
나의 꿈만으로 이루어지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나날은 끝나가고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고뇌하고, 그 군제 등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인 동시에 너와 나의 기본적인 문제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위기시대의 반역의 예술은 자기해체, 인간실격의 위험을 잉태하고 있지만 그러한 밑거름이 다음 시대의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낳는 힘이 될 것이다.
현대와 같은 자기해체의 시대에서도 예술이 목적하는 것은 사회를 통해서 자아를 살리고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흄은 예술을 기하학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의 두 종류로 구별하였다.
자기해체와 자기확충이라는 두 방향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하강지향과 상승지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서로 다른 특성은 예술존재양식의 독립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을 지향하고, 하나의 예술을 낳는 힘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파괴는 또 다른 자기재건, 자기확충으로 되돌아 오고 또한 자기확충은 때때로 좌절되어 자기해체의 방향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를 끝까지 살리려고 하는 하나의 힘이다.
(구토)의 주인공 로칸탄이 어느 날, 카페에서 맥주잔을 바라보며 공포에 시달리고 불안해 한다. 컵의 외형은 세상의 어디에나 있는 흔한 물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없는 형태와 같은 느낌 이 었다.
또한 로칸탄은 공원의 벤취 바로 밑에 깊게 박고 있는 마로니에의 뿌리를 보았을 때 심한 구토증을 느낀다.
"괴물스러운 물렁한 무질서의 덩어리-무섭고 음외한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덩어리만 남았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여분인 존재가 되어 소외감 때문에 불안해 한다.
작가는 때때로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한다. 광인 또는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불안과 공포의 감정에 빠져 들기도 한다. 현실과의 생생한 접촉을 상실한다 그러나 이 때 작가의 자기폐쇄공간은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깥세계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강렬한 소망의 좌절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어떤 형태로나 현실세계에 순응하지 못하는 내적갈등으로 고민한다. 이러한 내적불안과 갈등처리의 방법에 따라 쓰는 글의 내용과 형식도 달라진다.
따라서 현실을 절망하고 현실에 반역하며 자기내면의 세계로 도피하면서도 계속 현실과 접촉하며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열망이 글을 쓰게 만든다.
왜 쓰는가.
자기확충과 더불어 새로운 현실창조의 한 방법으로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표현의지의 자유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예술이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도피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정복의 수단이라고 대답하였다. 자기확충, 새로운 현실창조는 새로운 도전이다. 이러한 도전이 보다 나은 자기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문학과 삶
Ⅲ. 왜 쓰는가
시를 읽고 시를 사는 삶의 방식은 아름답다. 한 편의 시를 노래하고 착한 사람들과 멋진 자연환경과 이웃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의 환희이다.
삶은 우리들의 중심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 중심적 핵이 흔들리고, 방황하며 절망하는 고뇌속에 시간은 흘러왔고, 소중하게 그리고 의미롭게 자신의 삶을 창조적인 것으로 닦고 키워가는 지헤와 여유를 깨달아 가게 된다.
생명의 환희나 지혜와 여유, 그리고 처절한 절망과 갈 데 없는 고독을 우리는 표현하고자 한다. 표현욕구의 강렬성 때문에 예술은 창조되고, 예술가는 그 표현을 통하여 자신을 가다듬고 극복한다. 때문에 무엇이든지 표현하고자 하는 심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는 평범한 갈망이기도 하다. 사람은 현실의 수준에서 당면하는 욕구 불만과 갈등, 부적응과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며, 현실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감으로써 개성이 결정되고 발전된다. 그러나 사람이 당면하는 장애는 항상 합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타당한 방향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비합리적, 비현실적 적응을 꾀하여 욕구의 간접적 만족을 얻어 자아의 보호를 꾀하려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을 적응기제, 또는 방어기제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복잡 다양한 방어기제는 공격적 행동, 절충적 행동, 도피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심리적 방어기제에 의하여 예술은 위기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행복한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일련의 표현의욕으로서도 출발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실한 예술은 반드시 어떤 위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숨은 힘이다.
적응장애, 소외감, 열등감, 욕구불만, 갈등, 이런 것이 서로 모여 위기를 형성한다. 위기에서 인간은 불안과 절망과 초조를 느낄 것이다. 위기란 적응장애로 긴장된 심적상태이다. 위기에 처한 인간은 평상시와는 다른 갖가지 이상한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주어진 환경에 새롭게 균형을 유지하려고 욕망을 억압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맹종하거나 공격 한다.
예술은 위기를 당해 제일차 적응이 깨진 곳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작가는 심리적인 위기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변질시킨다. 이것이 예술적 승화이며, 작가는 이와 같은 창조적 행위를 위하여 글을 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자아를 타인의 마음 속베 새기겠다는 충동이 예술가의 예술창조행위를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칭찬을 추구하며 집요할 정도로 자아를 타인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글쓰기는 존재한다. 처절하다. 루소는 인간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자기만의 닫혀진 세계에서 고독한 몽상에 젖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반사회적 자세가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사회를 낳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형제도 이웃도 친구조차 없다. 자기밖엔 사귈 사람이 없다"고 집안에 숨었던 룻소는 습관이나 의무, 혹은 허위의식에서 해방되고자 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었다. 프로이드는 자아충동 속에 자기파괴와 자기보존의 힘이서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을 말하고 있다.
주위에 대해서 자기를 살리려면 그 어떤 점에서 자기를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이는 일이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를 살리는 길로 통하게 된다. 자아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려는 충동은 결국 자기의 생명을 확충하려는 충동의 나타남이다.
주위의 반항이 지나치게 강할 때는 자아는 희망이 없는 자기해체, 즉 자살이라는 방향을 생각하게 된다. 현대는 인간성장의 발달로 이와 같은 강렬한 저항을 받는 경우도 많아지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형이상학적 자아를 해체하고 인간성을 다양 ·복잡 ·혼돈 중에 부단히 유동하는 의식으로 파악하였다. 즉 비인간화의 경향으로 변질된 자아를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비인간화의 경향은 현대회화에서도 나타난다. 세잔느의 입체파에서는 선이나 면에서 인간적 생명감은 없어지고 추상적, 기하학적 성질로 단순화 되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음악은 어떤 것이며 그림은 어떤 것인가. 한편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처연한 서정을 가슴 가득 출렁이게 하는 그 낭만적인 여유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적 생명, 내적인 자기활동의 객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립스가 말한 바 미적 대상 안에 자기 자신이 자기의 생명을 이입하는 감정이입설은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예술의 맥이었다.
우리는 사회현실과는 유리된 공상의 세계와 개인사적인 문제의 안전지대에서 자기 삶의 탐구만으로 도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도망자로서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으며 문제제기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사회현실에 정면으로 맞설 때도 있는 것이다.
나의 꿈만으로 이루어지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나날은 끝나가고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고뇌하고, 그 군제 등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인 동시에 너와 나의 기본적인 문제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위기시대의 반역의 예술은 자기해체, 인간실격의 위험을 잉태하고 있지만 그러한 밑거름이 다음 시대의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낳는 힘이 될 것이다.
현대와 같은 자기해체의 시대에서도 예술이 목적하는 것은 사회를 통해서 자아를 살리고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흄은 예술을 기하학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의 두 종류로 구별하였다.
자기해체와 자기확충이라는 두 방향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하강지향과 상승지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서로 다른 특성은 예술존재양식의 독립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을 지향하고, 하나의 예술을 낳는 힘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파괴는 또 다른 자기재건, 자기확충으로 되돌아 오고 또한 자기확충은 때때로 좌절되어 자기해체의 방향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를 끝까지 살리려고 하는 하나의 힘이다.
(구토)의 주인공 로칸탄이 어느 날, 카페에서 맥주잔을 바라보며 공포에 시달리고 불안해 한다. 컵의 외형은 세상의 어디에나 있는 흔한 물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없는 형태와 같은 느낌 이 었다.
또한 로칸탄은 공원의 벤취 바로 밑에 깊게 박고 있는 마로니에의 뿌리를 보았을 때 심한 구토증을 느낀다.
"괴물스러운 물렁한 무질서의 덩어리-무섭고 음외한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덩어리만 남았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여분인 존재가 되어 소외감 때문에 불안해 한다.
작가는 때때로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한다. 광인 또는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불안과 공포의 감정에 빠져 들기도 한다. 현실과의 생생한 접촉을 상실한다 그러나 이 때 작가의 자기폐쇄공간은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깥세계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강렬한 소망의 좌절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어떤 형태로나 현실세계에 순응하지 못하는 내적갈등으로 고민한다. 이러한 내적불안과 갈등처리의 방법에 따라 쓰는 글의 내용과 형식도 달라진다.
따라서 현실을 절망하고 현실에 반역하며 자기내면의 세계로 도피하면서도 계속 현실과 접촉하며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열망이 글을 쓰게 만든다.
왜 쓰는가.
자기확충과 더불어 새로운 현실창조의 한 방법으로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표현의지의 자유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예술이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도피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정복의 수단이라고 대답하였다. 자기확충, 새로운 현실창조는 새로운 도전이다. 이러한 도전이 보다 나은 자기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출처 : 동해로 가는 동행 (새벽문학관)
글쓴이 : 게시판지기 원글보기
메모 :
'시강 및 시론 > ▒ 시강및 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문학이란 무엇인가〉V . 문학이란 무엇인가 / 정영자 (0) | 2010.08.22 |
---|---|
[스크랩] 〈문학이란 무엇인가〉Ⅳ.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 정영자 (0) | 2010.08.22 |
[스크랩] 〈문학이란 무엇인가〉ll . 문학은 즐거움을 준다 / 정영자 (0) | 2010.08.22 |
[스크랩] 〈문학이란 무엇인가〉I. 문학작품을 먼저 읽어라 / 정영자 (0) | 2010.08.22 |
[스크랩] 수필작법1 / 범 이야기 / 徐延절 (0) | 2010.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