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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시 이렇게 쓰자 1

정영진 2011. 11. 11. 11:26

현대시 이렇게 쓰자

- 본 글은 박진환 님의 "현대시창작"에 있는 내용을 간추려서 게재했음-


제1장 현대시 이렇게 쓰자


시창작에 따른 몇 가지 관심의 환기

. 物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은 사물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시적 대상으론 사물이 주어지고, 주어진 사물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시작 태도 및 발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때 사물을 보인 그대 로, 본 그대로 기록한다면 사실의 재현 이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일종의 모방의 한계를 극복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시를 모방으로 규정함(모방 개념은 플라톤류의 해석인 복사가 아니라 모방함 으로써 즐거움을 맛보는 쾌락의 원리로 봄
-시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로써는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냈을 때 가능해지고
사실을 이동하거나 변용했을 때 가능해 진다.
있을 수 있는 가능한 사실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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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됨.
物을 보는 법이 다시 제기됨.-사물을 누구나 보는 데로 보면 안되며 남이 볼 수 없는 부분을 본다거나 감춰진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있는 그대로를 이동시켜 본다거나 거꾸로 본다거나 뉘어서 본다거나 하는 변용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더 쉽지 않 는 일이다.

-예//"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예외없이 바람이 분다고 할 것이다. -보통사람의 생각
;가로수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가로수가 하늘을 쓸고 있다)-시인의 생각
→이는 곧 시인은 사물을 봄에 있어서 항용의 시각이 아닌 見者적 시각을 동원해야함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각, 꼭 보지 않고서는 안될 것을 볼 줄 아는 시각이 그 것으로서 이는 랭보가 일찍이 見者詩學에서 지적했던 바다.)

정서적 주정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습작기 사람들의 특성; 본 것을 본 대로 쓰고자 한 것과 같이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표출하고 자 함으로써 直情에 의탁하기 마련이다.;그 때문에 본 것을 본 대로 쓴 것이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듯이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쓰는 것도 느꼈 던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게 된다.
-정서적 진술이 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정서적 진술처럼 감미롭고 직정처럼 가슴에 직접 와닿는 것도 없다.
워즈워드의 지적
-시를 유로적 정서의 표출로 보아 버린다면 직정은 최선의 시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시는 어느 시대에고 그 본질이 변했던 것은 아니며 주어진 시대마다 드러냄의 방식, 즉 詩法을 달리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오늘의 詩法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오늘의 詩法을 한마디로 집약시킬 수 는 없다 그러나 엘리엇의 지적
-시는 정서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다.(한마디로 정서를 객관화하라는 주문임)
-정서의 객관화
:이것을 하기위해 정서를 물화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이를 엘리엇은 정서로부터의 도피라한다. (왜냐하면 정서로부터 도피하면 정서와 도피 사이 에는 거리가 설정된다. 도피 저쪽에 정서가 놓이게 되고 이 때문에 정서는 가슴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저만큼의 物이 되게 된다. 이 때의 물은 정서가 사물화됐음을 의미하고 정서의 사물화는 정서의 감각화, 즉 정서를 이미지로 대체하라는 주문이 되기에 이른다.

더 덧붙이 면 정서로 드러내지 말고 사물로 드러냄으로써 이미지로 대신 드러내라는 뜻인데 현대시를 한마디로 이미지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서를 객관화, 이미지로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다.
; 그 때문에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이 부분에서 좌초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 정서의 도피는 단순한 詩法上의 문제보다 그 배경에 철학이나 과학 그리고 前代적 미학에 대한 자각이 작용하고 있다.

-정서의 문제
;인간에게 있어 정서는 천부적인 것이다.
;정서적 환기력은 인간 공유의 것이고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것이다.(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것이다.)
;설혹 천부적 정감대를 타고 났다고 해도 꽃을 보고 느끼는 것은 끝내 아름다움 이상이 될 수는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름다움 이상의 것이 되지 못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나?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정서의 객관화, 즉 物化를 통한 이미지의 형상화다.
ex.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때
-가슴이 답답하다고 골백번 해봐야 답답하다는 이상을 드러낼 수는 없다.
-"윙윙거리는 불벌떼를
꿈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서정주[正午의 언덕에서]
(시풀이;정서의 物化에 대한 해답을 곧 얻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불벌떼-꿀과 함께 독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꿀맛보다는 독침에 찔려 아픔이 훨 씬 강렬한 속성으로 작용한다.

이 쏘아대는 불벌떼를 가슴으로 먹었다면 한 마리도 아닌 떼죽들이 가슴에 들어가 제마다 쏘아댔을 것이고 이쯤 되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빠개지거나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 이다. 이러한 아픔은 그냥 아프다는 사실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환 장할 아픔이다.
-바로 이부분이 열쇠다. 아프다는 사실을 미당은 아프다는 말 대신 아픔을 가져다주는 대상 사물인 불벌떼를 동원함으로써 정서를 物化했던 것이 된다. 엘리엇의 지적처럼 정서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정서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불벌떼라는 사물을 빌어 드러냈던 것 이다. -계속-

출처 : 소향 정윤희 문학의 쉼터
글쓴이 : 所向 정윤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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