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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시의 방향

정영진 2010. 10. 18. 19:00
 

    예술사조로 본 현대시의 방향

                                   -기독시문학을 중심으로-

                                             

              

                                                -정 재 영-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각 예술사조의특성

  1). 고전주의                        

  2). 낭만주의

  3).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4). 모더니즘

     가) 근대모더니즘

       a. 상징주의

       b. 유미주의

       c. 예술지상주의

       d. 신낭만주의

       e. 초현실주의

     나). 현대 모더니즘

         a).주지주의  

         b).아방가르드)

  5) 포스트모더니즘

3. 한국 기독현대시의 위치와 방향의 제언

4.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살아 있다는 말이나, 생명체라는 말이나, 그 뜻은 동일한 의미로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삶의 형태의 하나인 문화나 예술은 그 사람의 산물이므로 정체하지 않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고, 그 당연성은 과학적 의미의 학문의 모습으로 보여 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역사란 그 인간의 과정을 목적을 가지고 서술하며 판단해보는 일이다. 예술사조라는 말도 일종의 예술의 역사에 대한 평가의 한 면이다. 사조라는 언어의 뜻이 사상이나 생각의 큰 조류를 나타내는 말로서, 당대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고자하는 노력이다.

 세칭 현대를 특징하는 모더니즘과 후기모더니즘의 단어적 의미는 시대성을 배경하고 만들어진 특성을 가졌다. 고전주의에서부터 시작된 사조의 특징은 그 시대의 내용적 속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모더니즘은 근대나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구분을 하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현대라는 시대적 속성이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각 사조의 특성을 철학과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 등을 고찰해 보면서 예술사조가 내포하는 특징을 시론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론의 배경 위에 소위 21세기의 시의 나갈 길도 무리하지만 예측해보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여러 사조를 아주 간략하나마 정리해 보면 우리의 현 위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위치에서 전후좌우를 살피면 탈출구가지는 발견할 수 없어도 최소한 나아갈 방향정도는 감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를 가져본다.


2. 예술 사조의 변화의 배경과 특성


1) 고전주의


 고전이란 말의 뜻은 옛날의 전서, 즉 세월이 오래 흐른 역사를 가진 저술이나 작품을 말하는 것으로,  고전주의란 말도 옛날의 법식이나 의식을 중요시하고, 고대의 전적(典籍)중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 특히 문예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차용하여 사용하는 예술형식을 말한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그리스나 로마시대의 작품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태도이다.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중요시하는 예술 방법론이다. 문학을 위시한 예술의 형식은 간결, 우아, 고상의 형식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용은 고전이 뜻하는 것처럼 교훈적 내용을 작품에  담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 고전주의란 서구의 예술사조로 한정되는 것을 미리 말한다.


 시대적으로는 문예부흥이라는 중세종교시대에서 철학적 문예부흥과 종교개혁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중세종교시대란 소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그레고리 1세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시대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약 1000여년의 기간을 말한다. 즉 로마카토릭이 사상과 정치의 중심으로 활동한 시대를 뜻한다. 이때는 기독교가 모든 것의 기준이며 중심이었다. 인간의 사상이나 인간의 자리는 전혀 허락되지 않은 변질된 인간상실의 종교시대이며, 이 기간을 소위 암흑의 시대라고 말해진다. 이 암흑이란 당시 지도자급인 성직자의 타락과 지식인의 중심인 종교지도자의 정신적 부패와 무능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불신을 받았다. 인문주의와 과학의 발달과 봉건주의의 퇴락으로 인한 세계 정세는 자연히 그 중심세력인 로마카토릭의 붕괴를 일으켰다. 물론 이때 자체적인 개혁운동으로 소위 반개혁운동으로 정화 운동을 벌렸지만 이미 세상의 흐름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고개마루를 넘어서 진행의 속도와 방향을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영향에 의해 생기는 고전주의란 지난 시대를 거부하는 태도로 사상과 예술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예술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종교는 개혁이라는 운동을 거쳐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운동이기에 성서의 연구가 활발했던 때이다. 종교의 중심축이 개신교라는 모습으로 바뀌는가 하면, 반면에 신의 자리에 고대 그리스의 이성을 중요시하던 사상과 예술이 대신 차지하게 되는 시대로 자연히 변경된다. 즉 중세종교시대의 신의 자리에 이성이라는 인간의 모습이 그 자리를 치환시켰던 시대의 배경사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휴머니즘)의 정신적 바탕 위에 내세보다는 현실세계에 더 관심을 가진다. 이 인문주의는 신 중심에서 지상주의 가치관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왕정에 애국적이고 애국심을 가지게 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고전주의 예술형식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형식미를 모방하는데,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문장은 간결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세련미를 가져야하며, 표현은 품위를 가지고 저속하지 말아야하며, 문법에 충실하여야하고 문맥이나 줄거리는 통일성을 가져야한다. 묘사 또한 명확하여야하고 구조도 처음과 중간과 결말이 뚜렷하여야한다. 그 이유는 문학을 비롯하여 예술의 대상이나 소비자가 귀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절대왕정의 복귀로 절대주의적인 질서를 필요로 하였으며, 중세 로마카토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나 문학이론을 본떴던 것이다.

앞서 말한 이성 중심으로의 치환이란 데카르트를 위시한 합리주의자들의 사상의 지지를 받게 된다. 데카르트의 소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말은 존재의식을 신과의 대재적 존재로가 아닌 즉재적 존재로 존재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 모두 신의 부재의식과 그 자리에 이성이라고 불리는 사고의 의식으로 자리 바뀜을 시도하게 된다. 룻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 는 명제도 그 자연이 뜻하는 바가 각자 서로 해석이 다를지라도 돌아가는 중심은 신의 중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신과의 합일을 지상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겼던 중세시대에서 자연의 균형과 조화야 말로 인간의 모범이 된다는 그리스 시대의 철인들이 말했던 모방이라는 의미에 자연이 가장 부합되는 것이라는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 사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진리의 본질인 이데아(본질)를 감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그 최고 가지는 진선미의 조화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이성이란 신이 인간에게 남겨 준 창조의 잔재형상으로서, 신과 같이 우주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학에서 고전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과 영국의 드라이든, 포프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의 영향으로 서사시가 중심을 이루었고, 영국에서 꽃을 피웠다.

 고전주의는 작가의 감성을 억제하고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극단의 모습을 띠게 되는 18세기에 와서 독일의 레싱 등에 의해 반발을 일으킨다. 자연과학의 법칙을 중요시하고 합리적 사고와 함께 우매함의 계도를 위한 계몽주의의 사조로 발전되었지만, 감성을 너무 도외시한 나머지 새롭게 생기는 태도가 낭만주의로의 변화를 가지게 된다. 괴테와 쉴러가 대표적이다.  이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의 이성 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인 것이다.


2). 낭만주의

 낭만주의(Romantism)의 어원은 Roman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단어가 나타내는 뜻과 같이 로마의 특성  즉 개인의 자율과 감성을 중요시하는 태도로 독일에서 먼저 발생한다. 이상주의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1780년대는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봉건주의의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의 사회가 대두된다. 이 산업사회는 사람의 손발이 기계로 노동력이 변환되어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게 된다. 이 노동계급의 실업화는 신흥재벌인 부르조아 계급을 탄생시키게 되고 그 영향으로 물신주의의 풍조가 생기고, 이 물신주의는 기존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된다. 이 반동심리가 이성에서 감성으로 위치를 변하게 된다. 산업화와 기계화는 도시화의 성격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의 가치가 자본과 물신 숭배로 옮긴 고전주의의 세기말적 회의감이 낭만주의라는 감성중심으로 가치관이 변경되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자연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무한한 열정과 능력을 기대하고, 높은 이상과  앞서 말한 룻소의 자연 이라는 인간의 본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성품을 중요시하게 된다.




 영국의 윌리엄 워즈워스, 새무얼 테일러 콜리지등에 의해서 본격적인 시운동이 시작된다.

계승시킨 중요한 시인은 윌리엄 블레이크이다. 한편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첫번째 단계는 내용과 문어체 모두에 걸쳐 일어난 혁신과 신비적인 것, 잠재의식, 초자연의 탐닉이 특징을 띤다.


 우리나라에서 낭만주의가 대두된 것은 1920년대 초의 시에서이다. 인간의 이상추구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그 당시 지식 계급들이 현실로 나아갈 길이 전혀 없었던 현실도피성 경향으로 감상주의로 흐르게 된다. 즉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전통적 도덕과 인습에 거세게 반발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흔히 1920년대 낭만주의를 병적·감상적 낭만주의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인지 <백조> 를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이상화 등이 이에 속했다. 박영희의 〈환영(幻影)의 황금탑〉(백조, 1922.1)·〈월광(月光)으로 짠 병실〉(백조, 1923.9), 박종화의 〈사(死)의 예찬〉(백조, 1923.9),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백조, 1923.9) 등은 현실의 모든 번민과 집착의 저편에 서서 죽음에의 초대를 노래했다.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 1923.9)에서는 세상을 공포와 비애만이 가득 찬 것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1920년대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행위는 이상지향적 낭만적 정열이라기보다는 염세적 감상주의의 낭만적 허무로 끝나며, 그것은 오히려 현실도피에서 오는 변질된 유미주의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고 일정한 감정의 절망적 몸짓을 관습화하는 이러한 감상의 바탕에는 건강한 도덕성이 있을 수 없으므로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은 김소월 등 몇몇을 외에는 그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1920년대 초기 시대적 정치, 사회의 영향으로 감상 및 퇴폐적 성격으로 한국에서는 감상주의 문학의 염세와 허무주의에 의해 사실주의 또는 프로 문학에 주도권을 빼앗긴다.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구미의 애국심으로 민족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낭만주의는 표현양식이 아니라 추구하는 내용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3). 사실주의(Realism)


 객관적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는 예술사조를 말한다. 그동안 사실주의의 한문을 두 가지로 사용했다. 처음에 寫實主義라고 했다가 근자에는 事實主義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 한자는 예술사조의 성격을 먼저 강조 한 뜻이고, 근자의 단어로 변경된 것은 영어의 직역으로, 그 사고영역을 넓히며 사용하는 목적을 강조하는데 뜻을 둔 듯하다.

이 사조의 용어는 1800년도 중반부터 미술 분야에서 먼저 사용한 단어로, 왕이나 신화나 영웅이야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일반 서민의 사실적인 삶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쉽게 말하면 왕이나 영웅들을 그림의 대상이  농민들이나 광부들의 이야기나 그림으로 대상이 바뀌는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 , 귀스타부 「쿠르베의 돌을 깨는 사람들」이 그 단적인 좋은 예가 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의 흐름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철학적 영향을 받은 시대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줄거리나 인물의 묘사에 역점을 둔 반면 사실주의는 배경이나 환경에 묘사의 중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태도로 작품을 만들고자하는 의도에서  였다. 고전주의와 다른 점은 사물의 실재에 대한 표현을 냉철한 과학적 자세로 그려냈으며, 고전주의는 그 내용을 교훈적이나, 사실주의는 사회에 대한 고발성의 의도로 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시대는 산업자본가와 무산계급이라는 노동자들의 시민 혁명의 영향 등으로 봉건주의가 몰락하고,  과학의 발달로 실용주의가 주를 이루었다. 과학이란 합리적 이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이기에 실증주의와 공리주의는 사실주의라는 과학적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철학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우주를 신앙적 태도로 보던 사고를 과학적 자연탐구의 자세와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을 취하게 된다. 이전의 꽁트의 이론이 그 기저를 이루는 철학적 배경을 만든다. 모든 사물을 물질적이며 생물학적인 존재로 관찰하여 우리의 보편적 감각을 통해서 이해되는 현상만을 진리하고 믿는 경험주의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연주의의 예술이 그 극단적인 모습인 것이다. 낭만주의가 가진 이상주의적이며 미래주의적인 의식이 현재적이며, 실재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자들이 가진 경이로운 세계와 우주의 중심은 과학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인간이 그 중심에 서게 되는 시대가 됐다.

 이 사조는 시의 부분보다는 소설 쪽에서 더 발달이 되었는데, 그것은 소설의 표현양식이 사실주의의 방법을 사용하기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실파 소설가인 발자크, 스탕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현진건이나 김유정 등의 소설가를 들 수 있고, 시 분야에서는 1960년대의 소위 참여문학파인 김수영, 신경림, 조태일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현실의 모순과 사회구조의 고발방법으로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그 수단으로 문학 표현 양식과 대상을 사실주의 입장에서 시도하고 있다. 낭만주의와 다른 것은 내용보다 표현양식에서 더 큰 의미가 있겠다고 하겠다.


 사실주의의 극단적인 사조인 자연주의는 사실주의의 관찰과 경험에 더 한발자국 나아가 실험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에, 시 분야에서는 특별히 방법론상 의미를 지적하지 않겠다.


4). 모더니즘 (Modernism)


 모더니즘만큼 설명하기에 애매하고 넓은 범위는 없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시대적인 구분이지 예술사조의 성격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는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에 반항, 과학이나 합리성을 중시하고 널리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여 현대풍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예술상에서의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특히 1920년대에 일어난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형식주의(포멀리즘) 등의 감각적 ·추상적 ·초현실적인 경향의 여러 운동을 가리켜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여러 운동을 통틀어 모던 아트(modern art)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으나, 이것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말한다면 19세기 예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리얼리즘)에 대한 반항운동이며, 세계1차대전 후에 일어난 전위예술(前衛藝術: 아방가르드) 운동의 한 형태였다.  이 현대라는 시기의 예술사조를 일컫는 모더니즘의 사조에는 서로 지나간 사조들의 변형된 모습이 혼재해 있거나, 앞서 말한 사조들처럼 그 경계선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학문과 철학과 사회의 급변으로 그것을 대체하거나 보강하는 사조로 서로 혼재하고 있어, 여기서는 편이상 신고전주의와 일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주지주의를 중심하여 생각하려 한다. 이 주지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 시간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조들을 초기 모더니즘이라고 구분해보려 한다. 이 구분은 전적으로 사견일 수 있으나 이해를 쉽게 돕기 위한 방편임을 밝힌다.


가). 근대 모더니즘


 여기서 초기 모더니즘이란 넓은 의미에서 현대의 모더니즘과 동일한 양식이나 시대적으로 볼 때 부분적인 차이가 있어 고의적으로 구분을 시도해 본다.  여러 양식이 있으나  현대에서 많이 차용하는 사조들을 간략하게 서술해 본다. 현대의 본격적인 모더니즘에서 주지주의나 신고전주의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부 사조에 국한하여 선택한다. 주지주의 등 본격적인 모더니즘을 위해 성격만 간단히 지나간다.


a) 상징주의 (Symbolism)


 프랑스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사조로 내면의 세계를 사물로 암시적인 이미지를 묘사하여 드러내는 예술 양식을 가리킨다. 앞서 말한 사실주의를 위시한  고답파 등에서 반동하여 생긴 사조이다. 작가의 사상이나 정서를 구체적 사물을 통해 암시적으로 이미지화하여 나타내는 시도의 사조인데, 이것은 예술가들이 정신적인 내면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상징주의는 지적이고 객관적인 태도와 달리 감정, 직관, 관념에 기초하여 표현한 것은 주지주의와의 차이점이다.

 이 상징주의를 뜻하는 영어의 symbol의 어원은 symballein 인데, 그 말뜻은 짝을 맟추다는 의미이다. 후에 표시, 기호 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상징주의에서 노리는 것은 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해 언어의 의미를 무한대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으로, 상징이란 과정에서 나타나는 암시를 통해 본질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때 암시는 은폐요, 상징계는 의미의 제시인 것이다. 이 때 상징은 논리적 연상으로 수많은 사고를 유발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의 표현은 구채적인 사물을 통해 표현하는데, 그 내용에 담긴 의미는 다중성을 가지기 때문에 소위 시의 애매성을 초래하여 그 의미 폭의 확대를 꾀할 수 있다.

고티에, 샤를르,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등 같은 사람들을 손꼽을 수 있다. 한국은 김억, 황석우 등이 이 범위에 들어간다.


b). 유미주의 (Aesthetism)


 탐미주의 심미주의라고도 번역되는데, 예술의 태도와 목적이 미의 최고 창조에 둔다.

개인의 경험과 내면의 세계를 추구하며 도덕적인 기준이나 사회성의 요구보다는 감각의 기준에 둔 예술의 자율성에 목적을 둔 것으로 예술 지상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작가의 개인 특성과 정신보다는 감각에, 내용보다는 형식미에, 현실보다는 상상의 세계에 중점을 두는 사조이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c). 예술지상주의


 프랑스의 고티에가 주창한 것으로 예술의 목적을 오직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을 추구함에 둔 것으로 도덕적 , 사회적 목적을 배제함이 특징이다. 이 영향으로 상징주의 고답파, 데카당스(퇴폐주의) 등에 영향을 서로 주고 밭는다.


d). 신낭만주의(Neo-Romantism)




 사실주의에 반동으로 일어난 사조 중 하나로 직관으로 오는 감성이나 종교적 영성을 추구하는데 특징이 있다. 낭만주의적인 이상 추구가 종교적 신비성을 가지고 있는데 릴케의 시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성의 뒤편에 신비의 세계가 있음과 실재를 추구하는 영감의 원천을 탐구하고자 하는 예술적인 자세이다.



e). 초현실주의 (Surréalism.)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학 및 시각예술 운동이다.

심리학의 발달로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의 관심으로 인간의 본질의 모습은 무의식의 세계가 더 본질적이라는 관점에서 생겼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과거 유럽 문화와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이성주의가 결국은 파괴를 야기시켰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의 대변자로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공표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이며, '절대적 실재, 즉 초현실' 속에서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적인 이성의 세계와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또한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천재성은 일반적으로 미개발된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규정했다.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려는 목표만을 추구했다.  지고미(至高美)를 형식적 수단으로 해서 개인의 환상, 무의식과 의식을 탐구했다. 이 두 극단은 그 발전가능성의 영역면에서 구별된다.  읽는 사람의 마음에 무의식적인 연상작용을 일으켜 그 끝없는 탐구과정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유기적·상징적·절대적 초현실주의라고도 했다. 이와 반대되는 극단에서는 명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나 비합리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인식 가능한 이미지는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모호하고 역설적이며 충격적인 구조로 재구성된다. 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논리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이성적인 태도이며 소위 자동연상기술법을 만든다. 작가의 무의식으로부터 분출하는 혼돈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방법이다.  비재현적인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나). 현대 모더니즘


a). 주지주의


 어떤 이들은 주지주의를 고급 모더니즘이라고도 구분하여 말하기도 한다. 주지주의를 여기서 굳이 현대 모더니즘이란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이유는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시대에 중심적이고 보편적이며 통합적인 문학사조인 주지주의를 다른 모더니즘과 구분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앞서 말한 모든 사조의 종합적인 자세와 내용을 가진 사조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관념의 중심이 된 문학이 각 시대마다 반동을 통한 발전을 거듭하여 외부의 세계에 대한 내용적 관심에서 표현양식인 기법으로 그 중심의 축이 옮기게 된다.

모더니즘이라는 시기에 와서는 그동안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모든 사조가 망라되어 서로 부분적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얽혀 있다. 주로 상징주의에서부터 강조하기 시작했지만 고전주의의 조화와 엄격미를 추구하기도 하며 관념과 이상에서 작가가 각 시대의 현실에 처한 내면세계로의 이동을 통하는 종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특성을 가진다.

모더니즘이란 직역하면 현대(근대)주의라고 하는데, 이 말에서 내용과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라는 시기적인 특성에서 유발된 양식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현대성이라는 시간적 특성에서 유래됨을 말한다.

 그러면 현대적 특성이란 무엇일까?

현대라고 말하는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과학의 발달과 그것으로 야기된 대량의 죽음을 초래한 세계 1,2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들 수 있다.  과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통한 자유정신의 확장을 이루었지만, 과학이 만든 결점으로 이성에 대한 불신과 반대로 도시화에 의한 인간의 개성몰락, 그것에 따른 대중화와 함께 인간의 상대적 고독 등 앞 세대에서 가지지 못한 특수한 상황으로 갑자기 변화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스스로 철학적 질문을 깊이 하게 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체 점검을 현대적인 방법인 과학적 태도로 추구해 본다. 심리학, 문학, 언어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깊은 자기 성찰을 해본다.  영구성에서 순간의 찰라와 무한에 대한 유한, 감정의 객관적 태도 등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직관을 통한 이미지라는 강조의 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지 운동은 에즈라 파운드를 들 수 있으며, 기존시의 운율성을 중요시하던 것을 이미지라는 방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특히 이미지 중 과학적인 실념의 관점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이미지즘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추가되어 계속되는 시간상의 존재가 아니라 순간이라는 시각에 존재하는 마치 사진을 통한 이미지처럼 공간적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 흄 등이 말한 “견고하고 건조한 이미지”란  말 듯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물시(물리시)의 이론이 등장한다. 흄의 이론을 에즈라 파운드와 엘리엇에 의해 발전시켜 주지주의라는 현대적 예술사조가 생성된다. 이 이론은 특히 형식주의라는 야콥슨 등의 이론에 힘입어 토대를 튼튼히 구축하게 된다. 여기서 엘리엇에게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분야가 있다. 그것은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라는 견해인데, 이미지즘에서 말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그 사물의 현상 뒤에 담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하는 시법을 말한다. 즉 시에서 사물에 대한 사상과 감성을 파악하여 서로 하나 되게 하는 이미로의 표출을 시도하는 노력이다. 이곳에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서의 감각화를 소위 객관적 상관물을 이라고 부른다.

더욱이 러시아의 형식주의의 이론과 연합하여, 사물과 감정이 통합하는 유기적 관계를 모순된 충돌을 통한 긴장(tension)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랜섬 등을 위시한 비평가들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작품이 최고의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기법이 소위 ‘낯설게 만들기’라는  기법이다.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긴장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서로 아주 모순된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야 하는데,  이 모순된 이미지의 결합을 시도하는 예술적 행위를 소위 ‘폭력적 결합’이라는 언어로 나타난다.

 이성과 감성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사실주의의 과정에서 나타난 대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이 시대에 와서는 작가의 자신의 표현에 중심을 둔다. 즉 그리스 시대부터 문학의 가장 중요한 모방론이 표현론으로 위치를 변경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을 통한 상징주의 이론이 성립됐고, 더 나아가 이미지즘을 거쳐 주지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니체와 다윈 등의 유물론적 철학과 과학의식은  기존 정신질서체계를 무너뜨리고 허무주의와 다다이즘 등으로 변하여 인간은 스스로 자폐적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즉 문학의 관심은 내면세계에 대한 표현으로 변하게 되었고, 인간에 대한 의식세계와 무의식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사물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사물을 통한 그 사물의 배후의 이미지를 통해 본질을 파악하려 하는 지적 태도를 가지는데, 이것을 소위 주지주의라고 말한다.  이 이론을 도입하여 활동한 김광균의 시 <와사등>에서 군중 속의 고독으로 생기는 정서를 와사등을 통해 말하는 시법을 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국 문학에서는 1931년경 프로문학의 퇴장과 일본강점기의 대두를 계기로 나타났다. 이 이론을 초기 도입한 김기림이 시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배격하고 시창작 자체의 의식성을 강조하는 기술주의를 주장하면서 형태화되었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시운동을 벌이는데, 그 특징은 정서에서 지성으로 현실의 초월적 태도에서 현실비판적 자세로, 청각적 리듬에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모더니즘의 대표적 문인들로는1930년대의  프랑스의 P.발레리, 영국의 T.E.흄, T.S.엘리엇, H.리드, 헉슬리 등의 이론과 작품의 영향을 받은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등이 있다. 김기림의 장시 《기상도(氣象圖)》(1936)는 엘리엇의 《황무지》의 영향을 받은 당시 모더니즘의 대표작이며, 김광섭, 김현승 등의 시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1950년대의 김수영 ·박인환 등과 ‘후반기’ 동인들에 의해 모더니즘 시운동이 전개되었다. 1960년대의 ‘현대시’ ‘신춘시’ 동인들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시가 상실했던 상징적 내면의식과 초월의식을 형상화하려 했다.




b). 아방가르드


 혹자는 주지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일본식 표기로 영미 중심의 사조에 대한 의견이고, 아방가르드는 프랑스를 중심하여 말하는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의 총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달리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문자적인 뜻, 즉 척후병이라는 언어가 의미하는 전위적 성격으로 보는 좁은 의미로 아방가르드를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현대모더니즘의 전통예술 개념에 대한 부정적 자세로 많이 사용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특징은 그동안의 예술의 전통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파괴시킬 정도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현실주의입체주의, 다다이즘을 위시하여 미래주의를 포함한 예술기법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상의 시를 들 수 있겠다.


5.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다양하여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매우 난이하다. 그러나  일종의 아방가르드 일종으로 표현양식의 변환 형태라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세계2차대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내용의 변화보다는 표현기법의 전환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이념적 주의라는 단어보다는 현상의 한 단면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편이 알기 쉽다.

사회의 영향력이 대중의 구매력에 중심을 가지게 되어 모더니즘 시대까지 대중을 이끌고 온 중심세력의 힘이 소비자층인 대중으로 탈중심화 되었다고 설명하는 편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훈련된 특수층의 소위 고급문화(엘리트주의)가  대중문화로 자리바뀜을 시도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처음 시도한  형태를 팝아트에서 찾는 것도 그것을 설명하는 좋은 단초가 된다. 자리바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같이 어떤 확실한 자리매김이 아닌 과정 중의 위치를 설정하기에 꼭 꼬집어 위치를 설명할 수 없는 항상 혼합형태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혼합 예술 , 혼성예술 등으로 표현한다. 예술의 내용이 일상의 생활 도구로 하나 되는 시도일 수도 있다.

 대중에 대한 일반화의 내용과 기법은 예술의 신비성이 퇴색되는 탈신비화와 함께 대중에 이해되는 구상적 자세를 가진다. 패라디나 광고 예술에서 노리는 다중성을 시도한다. 다다에서 노린 방법의 전통에 대한 부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단순한 기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함께 작품의 표현이 가지고 오는 그 동안의 전통적인 가치관까지 해체내지 부정하는 자세를 취한다.  해체란 기존가치관에서부터 탈피하는 것으로, 모더니즘가지 가지고 온 절대성이나 보편성 등이 다원성과 상대성으로 가치이동을 가지고 온다. 특히 문학에서는 사실과 허구의 구분을 없애고,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하고, 독자들에게 문학의 해석에 대한선택권을 주는, 소위 미니멀리즘(Minimanism) 기법 등을 사용한다.

 한 가지는 절충주의인데 이것은 전통과 실험을 혼합하는 자세이다. 인습을 탈피하고 실험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는 그 과정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동시에 혼재해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과 전혀 다른 사조의 예술형태인 것이 아니라 서로 수용하고 비판하는 대립과 화합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것으로 그동안의 구미의 역사성에서 자기문화를 추구하는 미국중심의 새로운 문화실험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다민족사회로 구성된 미국의 문화처럼 작가의 개성을 중요시 하지 않고 작품의 미적 수준이나 깊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특이 독창성이나 개성을 강조함을 찾아 볼 수 없는 것도 특징이다.

 하나 더 특이한 것은 대중성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분야의 예술장르는 접근성이 쉬운데 비해 문학에서는 난해성이 심해진 것이 다른 분야와 다른 특징 중 하나이다.


3. 한국기독시의 현재의 위치와 방향의 제언


 앞서 간략하게 특징을 중심하여 살펴본 각 예술사조가 현재 한국의 기독현대시 뿐 아니라, 일반문학의 전 장르와 마찬가지로 각각 혼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한국문학사의 기간이 구미에 비해 일천할 뿐 아니라, 받아들인 순서도 각 사조의 존재 당위성을 가진 역사의 순서대로 겪으면서 만들어진지 않고, 각자의 작가들이 접촉한 순서에 의해 국내에 일제강점기 시대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입된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인 것은 일단 구미의 사조들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한국에는 아주 지연되어 받아들이게 된 연유가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우리의 현대 문학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거친 구미와 달리 100여 년 전 정도에 시작된 불모지에 갑자기 일본지배시대를 통해 일본을 접촉한 각 개인의 작가들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매우 당연한 혼란의 과정을 겪어 왔던 것은 당연하다. 고전주의 , 낭만주의, 사실주의, 주지주의 등은 이미 해방 전에 사용되었으며, 그 사조의 의미와 관계없이 사회의 발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탈농촌화와, 산업화를 통한 사회의식과, 정치적인 변환으로 생긴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 이런 예술사조들이 그 역사적인 필요에 따라 사용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길게 잡아도 5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문학의 현상과 같이 한국기독시도 많은 혼란의 과정을 거쳤던 과정은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독시인 한사람으로 제언을 하여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그 해결책을 한번 쯤 고민해보자는 의도로 그 방향을 제시하는 소견을 밝힌다.


 첫째, 기독시라는 정체성의 문제의식에 대한 결여이다. 여기서 기독시란 종교의 경전의 기독교시(Christianity poetry)가 아닌, 기독인으로서 기독시(Christian poetry)를 말한다.

여기는 단지 종교의 목적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인으로의 인간 존재 탐구와 인간이 본질적인 죄성을 가진 존재에서 바라본 실존적 모습과, 기독인의 살아가는 사회의 역사의 한 점에서 본 역사의식 등 인간이라는 전제로 본 예술의식이 곧 기독문학의 하나인 기독시라는 정의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결핍되어, 작품 자체가 과거의 작품보다 더 육화되지 못하고, 심히 우려할 정도의 미학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숨길 수가 없다. 


 둘째, 기독시의 존재 목적에 대한 무식 내지 무관심에서 유인된 점을 들 수 있다.

왜 기독시가 존재하여야 하는지의 당연성과 기존시의 특이성에 대한 무식함의 소치일 수 있다. 이것은 기독이라는 신학과 신앙 그리고 시라는 문학성의 연관성을 적절히 구성되지 못하게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문학인의 한 사람이자 신앙을 가지고 바라보는 문제의식에 대한 선지자적인 의식의 결핍을 들 수 있다. 사회와 분리된 도피적인 자기고백에 지나지 않은 작품이란 일반인들이나 기독인들 양쪽 모두에서 무시당하거니 도외시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것이다.


 셋째, 기독시의 미학적 수준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불충분했던 점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인들의 의욕과 노력의 결핍을 들 수 있다. 문학으로의 육화시키지 않고 성급한 욕심에 의한 자기표현방법의 저급성 때문에 사회의 고급예술을 포함한 지도자적인 사명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끌고 나갔던 앞선 초기 기독시인들과 예술인들에 비교하여 지금의 기독시인들의 대부분이 아주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현시금에 기독문화의 영역을 심각하게 우려를 고려해 보아야 할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기독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선교적 사명을 무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만일 시문학이 종교목적에만 급급한 사명이라면 고급예술인 시의 역활이 대중성의 사회에서는 필요 없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는 역질문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독시인들에게 아무리 목적시에 가까운 신앙시라도 시가 시다워야 한다는 것을 재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즉 그 내용이 아무리 심오하다 해도 어찌 성서의 내용을 뛰어 넘을 수 있겠고, 그것보다 더 훌륭한 내용이 어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진리라고 믿는 것들과  그 진리의 힘을 인간의 정서 내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미적 감동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문학이며, 그 문학이라는 것을 차용하여 인간과 인간의 삶을 통한 언어로 대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기독시인의 존재 목적 중 큰 분야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문제점을 살피면서 문예부흥이후 인류가 추구하여 온 예술 분야의 큰 흐름을 말한 사조의 관점에서 기독현대시의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종교가 다 그러하듯이 기독교도 초기 정신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거울을 삼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용과 형식기법을 그곳에서 찾는 기준으로 삼아야한다. 이런 면을 볼 때 그 기본은 그리스의 정신으로 돌아가 이성이라는 기준으로 출발점을 삼았던 고전주의의 자세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인간의 삶의 향상을 위한 정신적인 기초는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우아하고, 장엄하고, 조화로움을 추구하며, 인간이 신의 세계를 모방하는 그런 사조의 긍정점인 점을 함께 시도하여야 함은, 기독교 경전인 성서의 가르침 자체가 그 기저를 이루고 있음을 굳이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시야는 신적 존재에서 인간의 현실로 초점을 맞추어야 하리라고 본다. 신 중심의 역사관에서 인간 삶의 현장에 대한 애정의 시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삶 자체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사실주의와 매우 흡사하다. 신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시안이 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현존의식에 초점을 가지고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럴 때 기독교의 목적과 사명인 선교적 역량이 확대되리라고 본다. 그리고 신앙인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미래에 다가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분야에 대한 제시를 끊임없이 시도하여야 함에서 낭만주의 정신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신낭만주의에서 시도했던 사실들을 곰곰이 살필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그런 정신들을 어떻게 나타냄으로 작품으로 육화시킬 수 있느냐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한 숙제이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기독현대시는 모더니즘 중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한 세대를 풍미했던 주지주의에서 취했던 기법을 원용해야 한다고 본다.  상징과 이미지즘의 변용을 통해서 영적인 불가시적인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이끌고 오는 주지주의의 방법론은 현실감이 있는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나아가 강조하는 것은 주지주의 영향으로 ‘사물과 이미지와 결합’.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폭력적 결합’ 이 결합에 객관적 모습을 띠는 “객관상관물의 사용” 그리고 냉정하리만큼 정서를 숨기고 은폐함으로 상상의 극대화를 노리는 ‘정서로부터의 도피’ 등의 이론을 가지고 통합적으로 즐겨 사용했던 기법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형이상시이다. 이 형이상시는 위와 같은 문제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시의 최종 목표는 형이상시 자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시도했던 표현양식은 어쩌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일반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과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역사의 중심에 있는 기독인의 역할에서 본다면 한 번쯤 시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원래 본질적인 물음에 다가가는 선구자적이며 사명자의 길은 외로운 것이다. 지도자란 수적으로 많은 것이 아니다. 문학적으로 극도의 심오한 미학성을 가지고 한 분야의 예술을 끌고 가는 사람이란 그리하고 싶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본격 기독시문학을 하는 사람은 그 신앙인과 시인으로 두 가지 사명감에서 투철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독자의 대중성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루고 있어 왔다. 다만 본격문학으로써 기독현대시인의 역할과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시문학분야인 기독시의 창작에서 그 내용과 형식은 어디 까지나 기독정신과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의 신의식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기독시인은 기본적인 문학 방법론을 연구 개발하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여러 사조들을 살펴보면서 확신이 서는 것은 지나간 여러 사조들 중 가장 기독시에 가까운 사조적 태도는 주지주의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형이상시의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타다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첨가하여 부연해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지난 사조들이 절충되었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 사실을 다시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인은 모든 사고가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의 진리는 해석상에 입체적으로만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지주의에 기저한 여러 방법론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그 장점을 잘 살려 종합적인 문화양식을 가진다면 기독시인이 추구하는 순수본격문학과 목적문학이 기독현대시라는 장르를 가지고 성공적으로 공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4. 나가는 말


  긴 역사가 필요에 따라 만들어 진 모든 예술사조는 그 때마다 각각 의미가 있어 왔다. 뿐만 아니라 그 사조가 존재하여야 할 문학적 당위성이 있었기 때문에 한 시대를 이끌었다고 본다. 지나간 사조들이 그 때마다 존재 가치가 있어 왔지만, 현재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헤매다 막히고 있는 예술의 길을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원인을 찾아보고, 혹시 가능한 탈출구가 있나 살펴보고자 이글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술사조들의 계속되는 변화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현대라는 이름의 역사적 현 시점에서도 재사용 가능한 예술사조의 기능을 통섭학적으로 연합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확신이 든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기독현대시의 창작기법으로도 원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거니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확인된 것처럼 알 수 없는 방향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각각의 장점을 살린 모더니즘의 기법을 차용하여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다면 당대의 기독현대시라는 입장에서도 그것들은 매우 유용한 창작기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론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기독교현대시란 주지주의와 그 영향을 받은 형이상시의 근원을 추구하여 한발자국 발전과 변화를 통한다면 수준 높은 문학성을 가진 작품으로 표현될 수 있는 타당성 있는 창작기법을 구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출처 : 별물시낭송문학회
글쓴이 : Justin4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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