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강 및 시론/▒ 시강및 시론

[스크랩] 〈문학이란 무엇인가〉Ⅳ.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 정영자

정영진 2010. 8. 22. 22:20
〈문학이란 무엇인가〉Ⅳ.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정영자

문학과 삶

Ⅳ.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자율성을 확립시키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플라톤이 예술을 국가의 교육적 효과에만 돌린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독자적인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즉 인간정신의 자유롭고 독립된 활동으로서의 예술의 개념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작품에 도덕적인 목적을 요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의식, 현실고발이나 허무주의적 시같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를 주는 것이라고 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하였다.

톨스토이는 도덕을 희생시키는 예술을 부정하고 예술의 사회봉사를 주창하여 예술작품이 상류계급의 인사만을 도취시키고 부유한 사람만을 위한 위안물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크게 경고하였다. 사르트르는 작가는 자신의 자유를 순화하기 위하여서도 작품을 쓰지만, 생산적 피해계급을 위해 필봉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자유의 기수로서 예술가의 사명을 역설하였다.
사르트르는 허물어져 가는 인간성회복을 위하여 작가는 적극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인간을 둘러싼 갖가지의 폭력장치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실존을 회복시키는 데 문학의 역할을 이야기하였다. 니이체는 플라톤의 이성중심의 문학관과 아리트토텔레스의 감성중심의 문학관을 상호절충하고 통합한 균형잡힌 것을 주장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화해와 축연)과 아폴론적인 것(절도와 자기인식)의 결합이 니이체가 갈망하는 문학의 최고이상이라고 하였다. 즉 꿈의 상태(예술성)와 위풍있는 태도가 하나의 구조적인 전체에 통합하여 비로소 위대한 작품으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문학의 사회봉사 내지 현실참여는 사회성을 뜻하고, 토마스만이나 괴테의 '생기'는 예술성을 말한다.

꿈의 상태에 대한 심리적인 승화가 예술적 동기가 되어 왔음은 주지의 일이다.

프로이드는 "꿈은 소원충족 내지 소원충족의 기도"라고 하였으며 칼 융은 "꿈은 미래를 축하하는 무의식의 건설적인 활동의 표시"로 보고, 프로이드 해석의 소극성을 벗어나 '미래를 향해서 어떤 목적을 갖는다'라는 적극적인 해석을 하였다.

꿈은 공상에 비하면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꿈은 전적으로 현실에서 절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연장이다 마치 공상이 현실로부터의 도피만이 아니라 시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꿈도 원망의 충족만이 아니라 현실의 과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수도 있다.
니이체는 꿈의 논리학에서 "꿈은 낮에 현대의 문화가 요구하는 엄밀한 사고에 시달린 두뇌에 있어서 하나의 휴식이 된다"고 하였다.

모든 예술, 발명, 발견은 이 꿈이 구상화된 것이며 꿈에 의도적인 조작을 가하고 현실성 ·사회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이며 갇혀진 것인 '꿈'을 풀어 놓아 보편성, 사회성을 부여한 것이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꿈을 "우리들 마음의 가장 저급한, 가장 불합리한 기능 및 가장 가치있는 최고 기능의 두가지 표현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꿈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 얘기이다. 한 때 꿈이라고 하면 무의미하여 덧없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꿈에도 의미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비록 추악하고 억압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인간은 이 암흑과 야수적인 것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을 계속 만들어왔다.

꿈이라는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거기에 엄격한 인간의 인식이 조명될 때 여기에는 집요한 생명체의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그 에너지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의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에너지에서 문학이 쓰여지며, 그것은 꿈이라는 가설의 단계에서 출발하고 있다.

최근 문학작품의 이해와 평가를 독자(수용자)의 입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수용미학의 독자반응이론이 대두하고 있다.

야우스는 "문학작품의 역사성은 수용자의 능동적인 참여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견해에서 "작품과 독자간의 대화를 중요"하게 역설하였다. 과거의 답습만이 아니라 '자기의식'으로 성찰하는 '의식의 변화'글 이야기한 것이다. 작가와 독자사이에, 텍스트와 독자간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문학작품의 수용은 작가-작품-독자의 삼각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용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수용자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진다"는 해석학적 원칙과 "독자들의 기대가 창작 텍스트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견해에서 야우스는 작품 수용에서 '기대지평'의 재구성을 전제로 한다.

'기대'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창작작품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말하는 데, 야우스는 사회학적 분석에서 사용한 칼만하임의 '기대지평'이란 용어를 빌어 수용자가 지니고 있는 바람 선입견 이해 등 작품에 관계된 모든 전제를 총망라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평'은 결합영역에서 인식·이해 사고의 범주를 지적하듯이 수용자가 지닌 기대의 범주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의 창작문학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데에는 수용자인 독자의 기대지평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이 기대지평에 반응하는 작품의 상태와 영향의 정도에 따라 작품의 예술성이 결정되고 있다.

"작품은 독자의 독서행위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사르트르의 문학사회학적 견해의 독자론과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사회학적인 견해에서 독자의 중요성 강조, 하랄드 바인리히의 문학이란 작가와 작품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에 대응하고 있는 독자의 중요성 주장 등은 작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책임의식과 독자중심을 겨냥한 견해들이다.

예술작품은 감각이라든가 상상력을 통해서 지각되도록 창작된 표현 형식이어서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인간 감정이다. 이 경우에 '감정'이라는 말은 가장 넓은 의미의 고통·안락·흥분·평정 등의 육체적인 감각을 비롯해서 가장 복잡한 정서라든가 지적 긴장, 또는 우리들의 의식적인 인간생활의 끊임없는 감정의 굴곡까지를 표현하여 느낄 수 있는 일체의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일은 어떤 일정한 삶의 양상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 보다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추구하고 획득해 온 질서 위에 또 다른 삶의 방식과 인생의 해석을 새롭게 경험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문학은 있어 왔던 세계에 대한 정리나 특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주기를 바라는 희망의 세계와 가능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무엇인가 기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내포된 것이기도 하다.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작가 자신의 자유를 순화시키고, 자기의 정신적 구원문제에서 출발하는 글도 있을 수 있다. 자기사상, 자기서정, 자기철학, 자기의 이상, 자기만의 확충을 위하여서도 충분히 글은 씌어지고 또 그것은 독자에게도 좋은 표본으로서 한사람의 증언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만의 사랑, 자기만의 구원, 자기만의 행복이나 평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너는 나와 함께 하여야 되고, 나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하여 너도 행복할 수 있어야 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적 여건이 제기하고 있는 현실문제를 외면하고 작가가 어떻게 미래와 영원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은 물론 사회의 이상과 오늘의 행복된 삶의 확충과 내일의 비젼을 위하여 글은 씌여져야 한다.
출처 : 동해로 가는 동행 (새벽문학관)
글쓴이 : 게시판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