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리는 날/정연숙
겨울 긴 밤
방황하던 거리
겨울바람만 잔뜩 다녀가더니
달겨드는 저 퍼붓는 눈발
세상이 무너지도록
굵은 눈발로 바뀌면서
쓰러지는 나무와 집들
닫힌 세상은 지워버릴 것이 많아
지난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삶의 아픈 흔적들을 하얗게 덮고
가슴에 켜켜이 쌓인다
아침에 눈 뜨면
골목어귀에서 만나는
지친 하루를 살아가는
어른들 진저리 치는데
따뜻하고 포근한 저녁
궁색해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던
고분고분 손 시린 유년
아이들 눈을 뒤집어 쓰고
함성을 내지르며 뛰어다니고
오늘은 나도 눈발이 되어
누군가 가슴을 적시고
흩날리고 싶은 날
첫사랑 꿈꾸던 날
기쁨으로 가슴을 떨며
우리가 처음 만났던
푸지게 눈 내리는 고샅길에는
흑백사진 속에 묻힌 그 얼굴
목이 메이도록 그리움이 남아서
소복소복 아름다운 추억만 쌓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