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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곽재구 시모음

정영진 2016. 7. 24. 17:28

나희덕 시모음

-자두꽃빛에 대하여

나희덕

자두꽃빛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꽃은 열매의 외연일 뿐일까
열매가 맺힐 때까지만 유효한
그 후로는 잊혀지는

흰 꽃을 빌어
태어나는 붉은 열매
스스로를 찢고 나온 피투성이

자두꽃빛을 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고요한 자궁 속 양수의 빛깔
젖빛 같기도 하고 흰빛 같기도 한,
자궁이 터지는 순간 붉게 물드는 강물과도 같은

비 내리는 봄날
자두꽃 만발한 산길을 따라 적천사에 오른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없다, 이미 구름처럼 흩어져버린 자두꽃

- 당대비평(1998.여름)

 

-이 골방은

삶의 막바지에서
바위 뒤에 숨듯 이 골방에 찾아와
몸을 눕혔을 그림자들
그 그림자들에 나를 겹쳐 누이며,
못이 뽑혀나간 자국처럼
거미가 남겨놓은 거미줄처럼 어려 있는
그들의 흔적을 오래 더듬어보는 방
내 안의 후미진 골방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방
세상의 숨죽인 골방들, 그 끊어진 길이
하늘의 별자리로 만나 빛나고 있다.

-음지의 꽃

우리는 썩어가는 참나무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꽃이여
우리는 서서히 썩어가지만
너는 소나기처럼 후드득 피어나
그 고통을 순간에 멈추게 하는구나
오, 버섯이여
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
덮을 길 없는 우리의 몸을
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

 

푸른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탱자

한아름 따온 탱자는 가을과 함께 썩어간다
과즙이 향유가 된는 건
놀라움이 식지 않았을 때의 일
물에서 건저온 조약돌의 빛이 식어가듯
탱자는 시들기 시작하고
탱자를 담고 있던, 아니 숨기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는 하루하루 부풀어오르고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오면서 나는
썩어갈 슬픔 하나를 데리고 왔는지 모른다

며칠 전부터 비닐봉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그 속에 누가 갇혀 있는가
검은 살을 찢고 나오려는 푸른 가시들
제 가시에 찔려 눈이 먼 탱자꽃

탱자꽃 핀다 탱자꽃 핀다 썩어 문드러진 탱자 속에서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잎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때 나는

그때 나는 사과를 줍고 있었는데
재활원 비탈길에 어떤 아이가 먹다 떨어뜨린
사과를 허리굽혀 줍고 있었는데
내가 주워올린 것은
흙 묻은 나의 심장이었다
그때 나는 다른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내 손에 들린 것은
내 생의 무거운 가방이었다
그때 나는 성한 몸이라는 것조차 괴로웠는데
그 아이는 비뚤어진 입과 눈으로 자꾸만 웃었다
나도 따라 웃곤 했는데
그때마다 비탈의 나무들은 휘어지고 흔들렸는데
그 휘어짐에 놀라 새들은 날개를 멈칫거리고
새들 대신 날개 없는 나뭇잎만 날아올랐다
그때 나는 괴로웠을까 행복했을까


오늘 아침 땅 위에 떨어진 사과 한 알
천국과 지옥의 경계처럼
베어먹은 살에만 흙이 묻어 있다
그때처럼 주워 들었지만
나는 그게 내 마음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서 심장에 흙이 묻을 수 있다니
그랬다면 이 버려진 사과처럼 행복했을까 괴로웠을까

 

 

-나는 펄럭이고 싶다

똥을 털어내고 비누칠을 하면서
세상을 길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얼룩진 기저귀가
아기의 똥오줌을 받아내어 아기를 자라게 하듯
남의 밑에서 세상의 오물을 받아내고
구린내를 견뎌내면서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한다.
비누거품 속에서 자신을 헹구어내며
다시 기저귀가 되어가는 사람들,
푸르스름하게 얼룩진 슬픔을 털고
기저귀를 빨면서
부단히 더러워지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밝은 햇살 아래 눈부신 기저귀처럼
하늘 한모퉁이 나도 그렇게 펄럭이고 싶다.
보송보송한 살 한점 세상에 보태주고 싶다.

 

-달개비꽃 피는 창문

그 창문은 내 발길 아래 있다
지하의 방 한 칸
세상의 볕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별조차 내려오지 않는 창문에
달개비꽃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어난다
버석거리는 밥술과
자욱한 꿈자리
창에 들이친 흙탕물은
지나가던 내 발걸음 때문이었나
한때 가난은 나의 것이기도 했는데
가난조차 잃어버린 발길이
함부로 내딛다가 멈춘 자리
지하의 방 한 칸
오랜만에 불기를 넣었는지
낮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탄가스가
서성거리는 내 발목을 휘감는다
가난의 독기는
이제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간다
달개비꽃 파랗게 질린 입술로 떨고 있다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내가 기대어 살아온 것은 정작
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채우면 이내 사라지는, 허나
다시 배고픈 영혼이 되어
무언가를 불러대던 소리, 눈빛, 몸짓, 저 냄새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

그러나 허기가 아니었다면
한 눈빛
어떤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한 손이 다른 손을 잡을 수는 있었을까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밥그릇을 받아놓고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 시대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
거기 메아리를 얻지 못한 소리들만 갈앉아
뜨겁게 자갈을 달구는 시대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
마른 나뭇가지 처럼 그리로 그리로 기울고 싶다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 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 가고 살을 가져 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칸나의 시절



난롯가에 둘러앉아 우리는
빨간 엑스란 내복을 뒤집어 이를 잡았었지.
솔기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 이들은 난로 위에 던져졌지.
타닥타닥 튀어오르던 이들, 우리의 생은
그보다도 높이 튀어오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
황사가 오면 난로의 불도 꺼지고
볕이 드는 담장 아래 앉아 눈을 비볐지.
슬픔 대신 모래알이 눈 속에서 서걱거렸지.
빨간 내복을 벗어 던지면 그 자리에 칸나가 피어났지.
고아원 뜰에 칸나는 붉고
우리 마음은 붉음도 없이 푸석거렸지.
이 몇 마리 말고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칸나보다도 작았던 우리들, 질긴
나일론 양말들은 쉽게 작아지지 않았지.
황사의 나날들을 지나 열일곱 혹은 열여덟,
세상의 구석진 솔기 사이로 숨기 위해 흩어졌지.
솔기는 깊어 우리 만날 수도 없었지.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었을 때뿐이었지.
이 한 마리마저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일론 양말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저녁을 밝혀 줄 희미한 불빛에게
나는 묻지, 네 가슴에도 칸나는 피어 있는가, 라고.

 

-고등어 장수 -연화리 시편

곽재구

어느 날
강변 내 오두막집 앞에
한 고등어장수가 닿았습니다
먼 바다에서 온 그의 고등어들은
소금에 잘 절어 파랗게 빛났습니다
고등어 값은 너무 비쌌답니다
난 이렇게 말했지요
왜 고등어 값이 쌌다가 비쌌다가 그러지요?
먼 바다에서 온 고등어장수가
내게 말했답니다
당신 제일 가까운 곳의 사람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면서
먼 바다 고등어의 값을 어떻게 셈하겠소?

 

 

-사월의 노래

사월이면
등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며
첼로 음악을 듣는다

바람은
마음의 골짜기
골짜기를 들쑤시고

구름은 하늘의
큰 꽃잎 하나로
마음의 불을 가만히 덮어주네

노래하는 새여
너의 노래가 끝난 뒤에
내 사랑의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다오

새로 돋은 나뭇잎마다
반짝이는 연둣빛 햇살처럼
찬란하고 서러운
그 노래를 불러다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산수유꽃 필 무렵 -산동에서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을 삼십 리

얼음 풀린 봄 강물 -섬진마을에서

곽재구

당신이
물안개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밥 짓는 연기가 좋다고
대답했지요

당신이
산당화꽃이 곱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수선화꽃이 그립다고
딴말했지요

당신이
얼음 풀린 봄 강물
보고 싶다 말했을 때는
산그늘 쭉 돌아앉아
오리숲 밖 개똥지빠귀 울음소리나
들으라지 했지요

얼음 풀린 봄 강물
마실 나가고 싶었지마는
얼음 풀린 봄 강물
청매화향 물살 따라 푸르겠지만.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 리.

 

-얼음장 아래 고인 연분홍 눈물

얼음장 아래
연분홍 꽃 눈물 고였네
떠나가 오지 않는 친구야
맑은 자갈 세모래 틈새
배 터진 송사리 한 마리 얼어 죽고
강변 자운영 꽃밭은 시들었네
목소리 카랑했던 친구야
이 세상 제일 고운 오월 꽃 굴헝 속
자운영 꽃잎만한 목비 하나 떨구었네
가만히 귀 대고 들어보면
아직은 누군가 살아 있는지
배 터진 송사리 얼음장 아래
맑은 슬픔 단풍잎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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