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곽재구 시모음
나희덕 시모음
-자두꽃빛에 대하여
나희덕
자두꽃빛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꽃은 열매의 외연일 뿐일까 열매가 맺힐 때까지만 유효한 그 후로는 잊혀지는 흰 꽃을 빌어 태어나는 붉은 열매 스스로를 찢고 나온 피투성이 자두꽃빛을 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고요한 자궁 속 양수의 빛깔 젖빛 같기도 하고 흰빛 같기도 한, 자궁이 터지는 순간 붉게 물드는 강물과도 같은 비 내리는 봄날 자두꽃 만발한 산길을 따라 적천사에 오른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없다, 이미 구름처럼 흩어져버린 자두꽃 - 당대비평(1998.여름) |
-이 골방은
삶의 막바지에서 바위 뒤에 숨듯 이 골방에 찾아와 몸을 눕혔을 그림자들 그 그림자들에 나를 겹쳐 누이며, 못이 뽑혀나간 자국처럼 거미가 남겨놓은 거미줄처럼 어려 있는 그들의 흔적을 오래 더듬어보는 방 내 안의 후미진 골방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방 세상의 숨죽인 골방들, 그 끊어진 길이 하늘의 별자리로 만나 빛나고 있다. -음지의 꽃
푸른밤
-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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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잎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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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펄럭이고 싶다
똥을 털어내고 비누칠을 하면서 세상을 길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얼룩진 기저귀가 아기의 똥오줌을 받아내어 아기를 자라게 하듯 남의 밑에서 세상의 오물을 받아내고 구린내를 견뎌내면서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한다. 비누거품 속에서 자신을 헹구어내며 다시 기저귀가 되어가는 사람들, 푸르스름하게 얼룩진 슬픔을 털고 기저귀를 빨면서 부단히 더러워지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밝은 햇살 아래 눈부신 기저귀처럼 하늘 한모퉁이 나도 그렇게 펄럭이고 싶다. 보송보송한 살 한점 세상에 보태주고 싶다. |
-달개비꽃 피는 창문
그 창문은 내 발길 아래 있다 지하의 방 한 칸 세상의 볕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별조차 내려오지 않는 창문에 달개비꽃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어난다 버석거리는 밥술과 자욱한 꿈자리 창에 들이친 흙탕물은 지나가던 내 발걸음 때문이었나 한때 가난은 나의 것이기도 했는데 가난조차 잃어버린 발길이 함부로 내딛다가 멈춘 자리 지하의 방 한 칸 오랜만에 불기를 넣었는지 낮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탄가스가 서성거리는 내 발목을 휘감는다 가난의 독기는 이제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간다 달개비꽃 파랗게 질린 입술로 떨고 있다 |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내가 기대어 살아온 것은 정작 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채우면 이내 사라지는, 허나 다시 배고픈 영혼이 되어 무언가를 불러대던 소리, 눈빛, 몸짓, 저 냄새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 그러나 허기가 아니었다면 한 눈빛 어떤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한 손이 다른 손을 잡을 수는 있었을까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밥그릇을 받아놓고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 시대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 거기 메아리를 얻지 못한 소리들만 갈앉아 뜨겁게 자갈을 달구는 시대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 마른 나뭇가지 처럼 그리로 그리로 기울고 싶다 |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 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 가고 살을 가져 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
-칸나의 시절
난롯가에 둘러앉아 우리는
빨간 엑스란 내복을 뒤집어 이를 잡았었지.
솔기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 이들은 난로 위에 던져졌지.
타닥타닥 튀어오르던 이들, 우리의 생은
그보다도 높이 튀어오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
황사가 오면 난로의 불도 꺼지고
볕이 드는 담장 아래 앉아 눈을 비볐지.
슬픔 대신 모래알이 눈 속에서 서걱거렸지.
빨간 내복을 벗어 던지면 그 자리에 칸나가 피어났지.
고아원 뜰에 칸나는 붉고
우리 마음은 붉음도 없이 푸석거렸지.
이 몇 마리 말고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칸나보다도 작았던 우리들, 질긴
나일론 양말들은 쉽게 작아지지 않았지.
황사의 나날들을 지나 열일곱 혹은 열여덟,
세상의 구석진 솔기 사이로 숨기 위해 흩어졌지.
솔기는 깊어 우리 만날 수도 없었지.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었을 때뿐이었지.
이 한 마리마저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일론 양말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저녁을 밝혀 줄 희미한 불빛에게
나는 묻지, 네 가슴에도 칸나는 피어 있는가, 라고.
-사월의 노래
산수유꽃 필 무렵 -산동에서
-얼음장 아래 고인 연분홍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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