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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함민복 시인 ( 시모음 )

정영진 2016. 7. 24. 12:33

( 함민복 시모음 )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
1988년 《세계의 문학》 시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9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시집, 『우울씨의 일일』,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이레)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독은 아름답다

은행나무 열매에서 구린내가 난다
주의해 주세요 구린내가 향기롭다

밤톨이 여물면서 밤송이가 따가워진다
날카롭게 찌르는 가시가 너그럽다

복어알을 먹으면 죽는다
복어의 독이 복어의 사랑이다

자식을 낳고 술을 끊은 친구가 있다
친구의 독한 마음이 아름답다
 

 

 

 봄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서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나를 위로하며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감나무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어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 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시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뀅기에 낀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   

 

옥탑방



눈이 내렸다
건물의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서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단면으로 잘려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招魂하듯
흔들리는 언 빨래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리는
 

 

 

김포평야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 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불사 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탑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전구를 갈며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십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물고기 



부드러운 물
딱딱한 뼈
어찌
옆으로 누운 나무를
몸속에 키우느냐
뼈나무가 네 모양이었구나
비늘 잎새 참 가지런하다
물살에 흔들리는
네 몸 전체가
물 속
또 하나의 잎새구나 

 

 

초승달

배고픈 소가
쓰윽
혓바닥을 휘어
서걱서걱
옥수수 대궁을 씹어 먹을 듯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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