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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시 이렇게 쓰자 3

정영진 2011. 11. 11. 11:27

현대시 이렇게 쓰자


- 본 글은 박진환 님의 "현대시창작"에 있는 내용을 간추려서 게재했음-



예를 통한 시의 8단계

무슨 죄를 지었기에
종일토록 벌을 서 있는가
나무는

-- 벌선 나무로 변용이 됨.
창밖에 서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를 먼저 식별해야.
식별하는 방법 2가지
1. 무슨 종류인지 식별하는 능력으로서의 지식, 어떤 모습(무엇과 비슷하다-直觀)
2. 경험. 곧 경험과 지식이 육안에 추가돼 더욱 구체적으로 사물을 해석한다는 뜻
----육안에 지식, 경험, 상상력이 추가되게 되는데 지식과 경험과 상상력이 추가되면 비유가 성립됨
ex. 은행나무 한 그루가 헐벗고 서 있다/ 아카시아 나무가 앙상한 뼈만 드러냈다
-이것도 시적이나 "헐벗고나 앙상한 뼈란 표현은 우리가 흔히 나목을 보았을 때 쓰는 비유다. 곧 누구나 쓸 수 있는 비유로서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때 비유는 비유의 효과가 없어져 버린 사비유가 되어 시 이전의 수사학적 비유 가 된다. 그래서 시가 되기 위해서는

헐벗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추위에 떨며
더운 체온을 꿈꾸고 있다
→춥겠다고 하지않고 그 반대로 '더운 체온을 꿈꾼다'고 진술함으로써 사실을 사실 보다 새로운 사실로 이동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다든지

아카시아 앙상한 가지가
오돌오돌 떨며
소름이 돋혀있다.
→아카시아의 속성을 빌어 사실을 새로운 사실로 재구성해 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 은 나무를 그대로 보지 않고 새롭게 봄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주는 것이 되어 시적 진술의 초보적 단계에 해당되게 된다.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연상상상의 작용- 나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흔히 바람 때문으로 봄
봄 하면 꽃을 떠올리
비하면 우산
꽃 하면 나비
시가 사실의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나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데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은유에서의 치환이 요구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변용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역시 은유에서의 병치(竝置)다.

시의 발상차원의 3차 단계는 바로 치환이나 병치를 동원, 새로운 의미나 모습으로 태어나 게 하는 단계란 뜻이 되는데 여기에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곁들이면 천태만태가 된다. 보기 에 따라서는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춤을 추는 것같기도 하고, 머리칼을 흩날리는 것 같기 도 하고 또는 마치 하늘의 구름을 쓸어내는 빗질 같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무가 춤을 추 고 있구나'한다든지 '머리칼을 흩뜨리고 있구나'했다면 일단 비유는 성립되나 이 또한 흔히 쓰는 비유로서 새로운 감동을 주기에는 모자란다. 그러나 '나무가 검은 구름을 슬어내기 위 해 빗자루가 되었구나'한다면 훌륭히 시가 성립된다.

가로수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 / 가로수가 하늘을 쓸고 있다
-이렇게 썼다면 가로수가 하늘을 쓰는 빗자루로 변용되어 단순히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 라 하늘의 구름을 쓸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전혀 다른 사물로 태어나게 된다. 전혀 다 른 사물로 태어났다면 이는 곧 변용이 되고 동시에 가로수가 아니라 빗자루로 그 의미 또 한 이동되게 되는데 이는 변용과 치환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흔히 현대시를 정의할 때 변용과 치환의 미학이라고들 말한다. 또 현대시의 표현 기술을 말할 때 비유와 상징으로 대표된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비유와 상징은 곧 3차 단계에서의 변용과 치환에 해 당된다. 그리고 이는 시의 발상차원의 3단계는 현대적 해석의 낯설게 쓰기에 해당되는 단계 라고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용과 치환은 본래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그 모 습이나 의미가 이동되기 때문이다.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바람이 부니까 나뭇잎이 움직인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무가 손을 흔들어 바람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러면 신선한 감정이 생긴다.

가지와 가지 사이
험한길 마다않고
도폿자락 펄럭이며 찾아온 손을
나무들은 손을 흔들어
전송하고 있었다.

;바람은 '손님'으로 변용/ 나뭇가지가 흔들린 사실이 손님을 전송한 사실로 바뀌어 새 사실이 탄생함. 시는 관념을 버리고 사물로 변용하거나 새로운 관념을 끌어냈을 때 비로소 성공적으 로 형상화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나무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세밀히 본다는 것은 고정관념을 일탈하거나 초월하는 시력도 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흔히 말하는 구상화(具象化)를 요구한 것이 된다. 현대 시를 일컬어 형상화 작업이라고 한다. 새 모습으로 꾸며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 를 회화(繪 )라고도 하는데 이는 현대의 시각 문명에 걸맞게 시도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 로 생각한 것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란 주문이었던 것이 된다. 그것이 곧 형상화이고 이 형상 화는 곧 구상화 작업에 의존된다. 그리고 구상화되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찰이 더없이 요구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4단계는 이러한 현대시에 있어서의 형상화와 구상화의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무 속에 승화(昇華)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겉으로 들어나지 않지만 그 생명력을 승화시킨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드러내라는 주문이다. 나무의 생명력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이고 정신 적인 것, 곧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 사상과 같은 것들, 일테면 관념과 같은 것이나 우리의 가 슴에 가득히 서려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정서 같은 것들도 다 모습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 에 형상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그대로

사랑이여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사랑이여

한다든지, 또는 느낀 그대로

오, 가슴 아픈 사랑이여
끝끝내 채워지지도
채울 수도 없는 사랑이여
↓↓↓↓↓
했다면 느낀 대로는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이 생각한 것을, 느낀 것을 모 습으로 구체화, 형상화하라는 주문이니 모양새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썻다 지우고
지웠다 쓴
이름 하나.

이름 대신
말갛게 가슴만
닳아버렸다.

상금도 버리지 못한
보석보다 귀한
지우개 하나.

했다면 사랑이 지우개라는 사물로 변용됨으로써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화를 담담하게 된 다. 곧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으로서의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이미지를 빌어 형 상화됐다는 뜻이 된다. 정서의 경우도 같은 이치다.

열아홉 난 계집애의
시장끼
꽃피는 날엔
춘궁기의 배고품을
배 아닌 가슴으로 앓았다.

---사랑의 결핍이라는 정서적 해석이; '열아홉 난 계집애의 가슴으로 앓는 시장끼'로 구상화 됨으로써 가슴으로 해석하는 사랑의 정서가 사물로 대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나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눈에 보이는 사물로 대체, 형상으로 드러내면 되기 때문이다.

수술로는
절개해 낼 수 없는
종양
욋과병원 창들이
가지들의 터진 살갗으로
핏빛 얼룩을 문신처럼 새기고 있다.

이렇게 썼다면 문명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순수 무구한 자연의 생명력으로서의 개 화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때의 개화는 곧 나무의 생명력의 표출이고 또 이 생명력의 표출로 서의 모든 개화는 생명력의 승화에 해당된다. 이렇게 되면 나무의 생명력과 승화는 개화라는 가시적 형상화로 충분히 드러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시의 발상차원의 5단계가 내면적 이고도 정신적이며 형이상적인 것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게 회화화하라는 주문이란 걸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문에 드러내기에 알맞은 사물을 발견, 이로써 형상화하 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이나 견자시학에의 의존이라고 할 수 있다.

견자는 일찍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랭보의 말이다. 시인은 발견자여야 한다 는 뜻으로 한 이 말 속엔 첫째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시각의 소유자가 아니라,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드러나지 않고 가려진 부분가지를 발견해 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꼭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견자라고 했는데 앞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드러내주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가지들이 터진 살갗 은 개화를 뜻하고 개화는 나무의 생명력 내지는 생명력의 승화를 의미한다.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고 그 때문에 견자적 시각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思想을 본다.
--논리의 초월적 단계,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성립되는 또 다른 논리를 성립시킴

나무는
하늘과 손을 맞잡고자
종일 발돋움하며
팔을 내뻗고 있었다.

---나무의 사상도 생명력과 같이 불가시의 형이상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항용의 시각엔 포착되지도, 포착할 수도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발견해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초 나무의 사상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다. 부 득이 사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인 쪽에서 사상을 만들어 집어넣든지 끄집어내어 보여주 든지, 그렇게 꾸밀 수밖에 없게 된다.

나무가 하늘과 손을 맞잡고자 발돋움한 것은 구윈의 시사가 된다. 그것은 하늘이 久遠의 세계이자 구원(救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영원한 삶의 추구이고 그럼으로써 소멸로 부터 초월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무는 상승지향 이미지를 대표하는 원형상징의 표상 으로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희망한 것이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곧 나무를 나 무로서만 본 것이아니고 나무의 원형상징을 빌어 상승지향 이미지로서의 나무가 구원의 표 상이라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곧 사물을 사물로서만 해석하지 말고 초월된 모습까지를 포착하고 또 드러나지 않는 내면계까지도 투시, 새로움을 발견해 냄으로써 새로 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무료하면
종일 가지로 그네를 뛰며 놀다가
그도 심심하면
껑충껑충 토끼걸음으로
몰래 그늘을 뛰쳐나갔다
햇볕에 놀라 되돌아오는 바람.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역시 불가시의 것이다. 바람은 모습이 없다. 그러나 위의 예시와 같이 바람으로 하여금 그네를 뛰게 하고 또 토끼걸음으로 껑충껑충 그늘을 뛰쳐나갔다 되돌 아오게 하여 動態化하면 바람의 모습이나 행위가 의인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바람의 여러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 자체를 보고자 하지말고 바람에 모습이나 행위를 부여해야 한다. 앞 단계에서 관념이나 정서를 사물화, 시 각화하듯이 무형인, 그래서 불가시의 바람도 사물의 모습으로 변용하거나 의인화하여 모습을 부여함으로써 형상으로 드러나게 했을 때 바람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의 형상화이고 또 그렇게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꾸미는 것이 변용이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나무가 가리키는
손 끝 저쪽
수림의 향수가
자운으로 피어나고
피어나 일몰로도 지워지지 않는
계절 밖

- 나무 저쪽의 세계는 나무가 향수 하는 세계, 혹은 향수가 자운으로 물든 채색된 세계, 채 색되어 일몰에도 지워지지 않는 세계, 그것은 현상학적 물질계라기보다는 정신적이고도 형이 상적인 빗물질계, 즉 초월계이거나 절대 세계가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눈으로 보는 세계 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항용의 세계이고 그 이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세계는 가시권밖의 세 계는 곧, 정신적으로 포착된 세계로서 절대 세계, 초월세계와같은 형이상적 세계가 된다. 나 무가 항시 서서 발돋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지향으로 볼 수 있고, 이 드러나지 않는 세 계지향을 보는 것이 바로 나무 저쪽의 세계를 보는 시인의 견자적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마 지막 단계에서는 이러한 형이상적 세계를 볼줄 아는 시력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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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

과목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명멸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성룡 [과목]전문


1연-- 과목에 과일이 무르익어가는 것을 보면 계절이나 우주의 섭리를 깨닫고, 놀라움을 드 러내는 시다. 그래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과물과, 과물이 열려 성숙해 가는 불 가시의 생명력가지를 투시하는 시각이 동원되고 있다.
2연--계절 앞에 선 나무 그대로를 보면서 그 속에서 자연의 여러 조건을 극복해 가는 또 다 른 생명력을 읽어내고 있다. 발상차원의 단계에서 보면 5,6단계에 해당됨.
3연--계절의 소멸 속에서 빛깔과 무게로 영글어 가는 생명력과 그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또 성숙하게 하는 자연의 섭리나 신의 은총까지를 투시함으로써 발상차원의 7,8단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출처 : 소향 정윤희 문학의 쉼터
글쓴이 : 所向 정윤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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