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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광규

정영진 2010. 10. 13. 02:13

미루나무 / 공광규


앞 냇둑에 살았던 늙은 미루나무는
착해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
제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아무한테나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울거나
한여름에 반짝이는 잎을 하염없이 뒤집던 나무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를 기대어놓고
낮잠 한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것에도 못 쓴다며
무시당하고 무시당했던 나무

그래서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 갔던
아주아주 오래 살다가
폭풍우 몰아치던 한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

압록 저녁


강바닥에서 솟은 바위들이 오리처럼 떠서
황홀한 물별을 주워 먹는 저녁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 강도 저와 닮아
속마음과 겉 표정이 따로 노나 봅니다
강심은 대밭이 휜 쪽으로 흐르는 것이 분명한데
수면은 갈대가 휜 쪽으로 주름을 잡고 있습니다
대밭을 파랗게 적신 강물이 저녁 물별을 퍼 올려
감나무에 빨간 감을 전등처럼 매다는 압록
보성강이 섬진강 옆구리에 몸을 합치듯
그대와 몸을 합치려 가출해야겠습니다


수련


제주 북촌 너븐숭이 공원
비에 젖는 수묵담채화 바위 웅덩이 옆
오래된 소나무가 추사체로 서 있네

그해 겨울 맨 손톱으로 판
바위 구덩이에 빗물이 팽팽 차오르자
피가 배어나온 붉은 수련

들개와 까마귀와 벌레가 뜯어먹다 버린
찢어진 살덩이 하나
둥근 잎 굴리며 붉게 떠올랐네.



모이


서울역 광장,
아이들과 거지가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비둘기들이 부산하게 받아먹고 있다
서로 머리를 부리로 찍으며 다투기도 한다.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자본과 권력 주변에 모인
학자와 언론과 공기업과 대기업 노동자처럼
고개를 처박고 미친 듯이 주워 먹고 있다.

모이 주변에 달라붙어
조화와 균형과 평등을 두려워하며
자기보다 약한 주둥이를 발로 차고 있다
세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썩은 말뚝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퍼올리는데
흙 속에서 누군가
삽날을 자꾸 붙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
논둑을 지탱해오던
아버지가 박아놓은
썩은 말뚝이다

썩은 말뚝 위로
흙을 부지런히 퍼올려도
자꾸자꾸 빗물에
흘러내리는 흙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
세상일처럼 쉽지 않아
아픈 허리를 펴고
내 나이를 바라본다

살아 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흑, 하고 운다.


사람과 문장


사람의 일생은 물음표로 시작되네
물음표 태아는 스스로 찢어 손발을 만들고
자궁 밖으로 나온 손발은 펜촉이 되어
시간을 종이삼아 문장을 쓰네

사람의 첫 문장은 울음이네
첫 문장이 나쁘면 다음 문장도 나쁜 법
늘 틀린 문장과 틀린 답을 쓰다가 파지만 내다가
병상에 물음표로 눕네

병상 위에 물음표로 구부러진 손가락
물음표로 오그라드는 몸통
물음표로 끝을 흐리는 임종 전 목소리
그러다 마지막 문장을 비명으로 쓰네

사람의 일생은 물음표로 시작되어
물음표로 끝나네
사람의 문장은 울음으로 시작되어
비명으로 끝나네.


걸림돌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 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 마다
"자식이 원수여 ! 원수여 !'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는 저녁에 덜 되먹은 후배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 못난 놈 !"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애장터

입을 꾹 다문 아버지는
죽은 동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앞산 돌밭에 가 당신의 가슴을 아주 눌러놓고 오고

실성한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구욱구욱 울며 마을 논밭을 맨발로 쏘다녔다

비가 오는 날마다
누군가 밖에서 구욱구욱 젖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누구유!” 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그때마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젖은 마당에 상형문자를 찍어놓고 돌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가 그걸 읽고 돌밭으로 가면
도라지꽃이 물방울을 매달고 서럽게 피어 있었다.



무량사 한 채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에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나무문살 꽃무늬단청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흙집 사리

오래 살아서 장마에 쿵! 하고 무너진
시골 헌집 옆구리를 삽으로 파내는데
깨진 장독과 버려진 사기그릇과
녹슨 쇠붙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각난 오줌독과 개밥그릇도 나뒹군다
째그락거리던 식구들의 말소리와
염생이와 강아지와 동생들이 놀던 소리도 들린다
마침, 햇살이 들자
깨진 장독과 사기그릇과 오줌독과 개밥그릇과
쇠붙이 모서리들이 반짝거린다
수십 년 살다 죽은 흙집 사리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두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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