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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詩的 言語란 무엇인가?/윤정교수

정영진 2010. 10. 6. 15:36

詩 的 言語란 무엇인가?

 

 


(부제: 한민족 의식 속에 흐르는 언어의 혼)
언어심리 분석가 - 윤 정 교수




시가 무엇인지 그리고 시적인 언어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모순 되지는 않더라도 아주 다양한 차이를 보이는 작품들이나 행위들이 요즘 들어 시(詩)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주저 없이 시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은 언어의 세계는 무한하다. 따라서 생각과 감정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길은 무수히 많다. 역사적 상황들이 시인에게 절박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사회 해석에 우선권을 두라고 요구해 왔던 것이 역시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인의 행동과 작품에서 확인되는 이 명백한 차이는, 언어에 깊게 뿌리내린 기본적인 경험이 단어의 사용에 존재하며 그 경험이 시의 표현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특수성을 확인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부터 나는 이러한 확신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볼 생각이다. 하지만 먼저 언어의 성격과 기능에 대해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단어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의도를 이해시킬 생각으로 단어를 사용해야 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전하려는 대상이나 사건의 특정한 면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나 사건이 언제나 지나치게 복잡해서 단번에 포착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단어와 한 단면의 연상 관계를 우리는 개념이라 부른다. 따라서 그 단어에서는 연상된 단면 이외에 대상이나 사건이 갖는 다른 모든 면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개념은 인간의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즉 세상을 조직하는 일에서나, 생각이 물리적 현실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사유에 관계되는 일에는 반드시 개념이 필요하다. 개념이 없다면 즉 개념을 통해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동물적 존재로서 본능적 행동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념적 도구는 우리 의식에, 심지어 우리 삶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위험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개념과 더불어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이 한 대상에서 떼어 낸 한 단면에서 다른 대상에서 떼어 낸 다른 단면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한에 가까운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실 체에서 떼어 낸 추상적인 면들만이 구체적으로 고려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현실 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세상이나 삶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 환경을 이루면서 우리 삶을 바로 곁에서 조건 짓는 세상의 완전한 모습에서 우리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장미꽃은 하루밖에 가지 않는다. 그것도 아침나절에만 핀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꽃, 꽃잎, 가시 등 장미를 특징짓는 개념은 시간 밖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시간의 경험을 되살려 낼 수 없다. 따라서 실제의 장미가 숙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시듦의 시간이 닥칠 때 시듦이라는 개념만으로 우리는 내면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요컨대 우리가 개념을 통해 생각하면서 시듦을 그 자체로 표현해 보려 시도하더라도 시듦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 수준에 머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면서 시간과, 늙음과, 죽음과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존재이다. 그런데 개념적 사고에만 파묻힌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경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해서 고유한 내면세계를 만들어 가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경솔하게 개념적 사고에만 몰두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진정한 세계와 단절해 버린다면 물질적 현상이야 분석해 낼 수 있겠지만 예컨대 사랑의 욕망까지 완전하게 파헤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적 존재의 특이성이라 할 수 있는 욕망과 욕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눈에 비슷하게 보이는 존재는 결국 타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서글픈 우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시란 무엇일까? 서구 문명의 과거에서 시가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가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오래 전 시는 형태를 기준으로 정의되었으며 이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작품으로서의 시는 형태라는 규칙에 따라 단어들을 결합시키면서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었다. 그리고 악센트가 특정 음절을 지닌 단어를 돋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그 수를 헤아렸다. 또한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악센트의 수를 나름대로 정할 때 형식적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verse)'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행은 근본적인 하나의 형태이다. 다른 규칙들은 이 형태를 확인하고, 청자나 화자에게 행의 의식을 용이하게 해 주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예컨대 각운은 연속되는 두 행을 이어 주며 다른 행이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더해 주는 수단이다. 또한 절과 연도 낭송할 때 시의 형식적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산문과 구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산문도 형식적 구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구조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생각의 흐름이 말로 표현될 때 일정한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관심을 유도하는 식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형태일 것이다.

시를 형태적 규칙으로 정의하며 시를 쓰면서 그 규칙을 준수 하는 것으로 만족해 버린다면, 인간과 시의 관계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시에 음절과 악센트의 조화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세련된 감수성, 때로는 보편적 지식까지 담아내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시인은 시를 통해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 즉 개념적 사고를 뛰어넘으려는 고뇌와 직관을 표현해야 했다. 이처럼 시인을 물건 즉 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테스 (vates,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 혹은 분절화 되지 않은 통합적 인간)로 해석하는 흐름이 결국 낭만주의 시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보들레르와 상징주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샤토브리앙, 네르발, 프루스트 등의 작품처럼 운율법을 도외시한 산문체 글에서도 시적인 흥취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시라 인정하는 것에 깃들여 있는 의미 즉, 낡은 규칙이 규정한 범위를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선 의미가 형태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이제 시작(詩作) 행위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단어의 형태는 단어를 지배하는 외형의 것이 아니다. 단어의 내재성에서 그 단어만의 고유한 직관, 그러나 잠들어 있는 직관을 다시 찾아내어 해방시키는 것이다. 단어의 형태를 통해 잠에서 깨어나 되살아난 직관의 힘을 빌려 우리 정신은 개념의 개입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 우연과 존재에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시에서 형태란 무엇일까? 바로 소리이다. 하지만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는 수준에 불과한 의미 작용에서의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소리이다. 세상의 심연까지 내려가 전체를 완벽히 대신하는 부분이며, 자아에 매어 있지만 밝은 빛을 내뿜는 침묵하는 무한에 비유하는 소리이다. 개념 때문에 잊혀진 것을 되살려내며 완전한 것으로 거듭나는 소리이다. 바로 여기에서 시가 탄생된다. 형태는 소리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전달된다. 완전하게 표현된 소리는 행 속에서 해체되지 않은 세상 자체로 존재하며 읽는 이가 개념적으로만 시에 접근하는 실수를 막아준다. 또한 완전한 소리는 실제의 것에 접근할 권리를 독점하려는 개념의 횡포에 저항한다. 시 즉 소리를 지닌 형태가, 언어에 대한 개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개념의 사슬을 고발하고 탄핵한다.

존재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실존적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시는 ‘무엇인가를 아는 것’ 이다. 적어도 시는 이런 앎의 탐구이다.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악기에 기대어 현(絃)의 공명에 귀를 기울였듯이 소리를 통해 소리를 탐구하는 행위인 셈이다. 이런 탐구 행위에도 시인들의 독특한 기질 때문에, 또한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 때문에 무척이나 다양한 길이 열려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게 되고 그 차이들이 강조되는 것이다.

결국, 시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성은 절대적인 부재에 근거를 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진실을 철학적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단어는 곧바로 공식화되어, 단어의 용례들과 그 단어들을 경험하는 방법들을 뒤집어 버리는 깨달음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無와 마주치면 시인은 단어가 여전히 소리일 수 있는 글쓰기의 공간 즉 소리의 심연에 머물러야 한다. “내가 무를 보았다.”라고 말했지만, 곧바로 “무를 발견한 후 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라고 덧붙였다. 달리 말하면 그가 언어의 미래를 어휘의 관계에 맡겼다는 뜻이다. 어휘 관계들을 통해서 자연 세계의 단면들이 시에서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흔히 포스트모던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점에 실제로 창조되는 것들은 내가 시에서 기대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시는 과거에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페트라르카와 단테, 셰익스피어, 심지어 빅토르 위고에게까지 영혼의 양식을 공급해 주었지만, 요즘의 시에서는 미래로 인도해 줄만한 어떠한 조언도 찾을 수 없다. 특히 요즘 들어 프랑스의 사회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시의 부재 현상을 습관처럼 입에 올리고 심지어 시의 종말까지 거론하면서도 조금도 아쉬운 표정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지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시는 분명히 존재하며 예전만큼 많은 시가 발표되고 있다. 때로는 과거의 그 어떤 시기보다 시의 특수성을 과시하는 작품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 시가 본연의 것으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문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론가들의 공론은 시의 탐구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리가 죽었다. 그 때문에 대중은 시에 무관심해진다.

그러므로 개념에 의한 언어의 지배, 언어의 운율적 취약성 등이 지금의 상황을 빚어낸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유감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 화자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따른 타락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시는 반드시 필요하다. 시의 창조가 민주주의 정신의 씨앗이며 민주주의가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절대적 존중이 아니라면 시가 왜 있겠는가? 시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시는 인간의 삶에 빠질 수 없는 구원의 목소리이다. 그런데 시가 죽어 가고 있고 사회는 위험에 빠져있다. 시가 회복하기 힘든 위기에 빠질까봐 진실로 두렵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분명히, 시에서는 주체도 타자도 사물이 아니다. 적어도 시에서 우리 안의 존재는 생물학적 수명을 즐기지 않는다. 자아와의 관계에 현재성을 돌려주려는 결정, 시로 표현되는 단어들에 대한 작업에서 시도되는 결정에서 우리 안의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이 작업 덕분에 시인이 탄생한다. 이런 작업 덕분에 타자가 실제의 삶에서 어떤 불행을 겪고 있더라도 인간의 삶에 동참하며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타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서로를 희생하면서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다. 상호희생은 사건과 인간에 대한 개념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뿐이다. 우리가 타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시의 언어이다. 또한 유한성을 완벽히 깨달은 이성, 철학과 시학의 연대에서 창조해 낸 이성이 이데올로기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철학과 시가 만나야한다. 개념 안에서 그리고 개념을 초월해서, 현재성을 되살리고 사회에 필요한 사상과 판단과 가치관을 현재성의 관점에서 재배치할 수 있는 완전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시적인 직관이 문명의 조언자로서 다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시는 언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詩香의 숲 綵雲齋[4대강 패륜 STOP]
글쓴이 : 無影/박희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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