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성미정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성미정
유일한 재미라야 가끔 맥주를 마시는 것과
재미라곤 약에 쓸려고 해도 없는 남편을
골려주는 재미로 사는 35살의 가정주부
성모 씨가
어느 날 띠포리라는 멸치 비슷한 말린 생선을
만난 후 다양한 재미에 빠져드는데
띠포리에서 깨끗한 국물을 뽑기 위해선
대가리와 내장을 발라내는 게 필수
그런데 이 띠포리란 놈은 멸치와 달리 납작하고
뼈가
센 것이 특징이라 잘 벗겨지지 않는
재미와 손가락을 찔리는 재미
게다가 금방 손질을 끝낼 수 없는 재미까지 있는데
35살의 주부 성모 씨는 띠포리를 손질하는 게 재미있을수록
띠포리가 줄어드는 만큼 불안 또한 커져 가는데
급기야 띠포리를 다
손질하지 않고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아껴 손질할 생각까지 하게 되고
어느 적막한 밤 성모 씨가 남편에게 묻기를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남편 배모 씨는 너무나 비장한 아내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혹시 띠포리가 떨어지면
아내가 자살할까 봐 내심 걱정이 되길래
띠포리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서
채워놓으리라
성모 씨에게 다짐을 하고
그날 이후 35살의 주부 성모 씨의 인생엔
근심 걱정이 없다는데 세상이 아무리 지루해도
띠포리가 있고 띠포리를 사
주겠다는
남편이 있으니 더 이상의 행복은 욕심이라며
자신을 타일러가며 띠포리를 손질한다는데
사진 - <daruine>님의 블로그에서
성미정 시인
1967년 강원 정선 출생. 강원대 사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에 「가둔다」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시집 - 대머리와의 사랑 (1997년 세계사)
사랑은 야채 같은 것 (2003년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