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시인
1960년 2월 1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남 .
1979년 연세대학교 정외과 입학 1985년 졸업
1984년 중앙일보사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 근무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안개' 당선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
작품 :
기형도 전집, 입 속의 검은 잎,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출처 : 詩香의 숲 綵雲齋[4대강 패륜 STOP]
글쓴이 : 無影/박희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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